조선시대 때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配享)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1621년(광해군 13)에 소실되어 1640년(인조 18) 장의(掌議) 백이원(白彝元)이 유림들과 함께 초가를 세워 공자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1645년이삼립(李森立)·이대용(李大用)·차득철(車得轍)·이필찬(李弼贊)·임평(林坪)·장만세(張萬世)·이병번(李丙藩) 등이 성묘(聖廟)와 재실(齋室)을 설립하였다.
1653년(효종 4)에는 부사 이경면(李慶棉)이 오례의행제의(五禮儀行祭儀)를 등본하게 하였으며, 1664년(현종 5)에는 부사 윤우량(尹友諒)이 교장 이시강(李時橿)과 함께 성묘를 중건하고 제기(祭器)를 갖추었다.
1726년(영조 2) 감사 윤헌주(尹憲柱)가 명륜당을 설립하고, 1744년에는 부사 유춘복(柳春馥)이 훈장 이세붕(李世鵬), 장의 장홍재(張弘載)·장운하(張雲河), 성조감 이덕순(李德純) 등과 함께 재실과 남루(南樓)를 다시 수축하였다. 그 뒤 1759년에 중수하고, 1774년 성묘를 개축하였다.
당시 경내 건물로는 대성전·동무(東廡)·서무(西廡)·신문(神門)·명륜당·강당·동재(東齋)·서재(西齋)·전영·헌관실(獻官室)·제기고(祭器庫)·주포방(酒脯房) 및 동서 협문(夾門) 등이 있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10철(十哲), 송조 6현(宋朝六賢), 동무·서무에는 우리 나라 18현(十八賢) 및 중국 94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조선 후기 이래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였다. 봄·가을에 석전(釋奠: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해 왔다. 1950년대 이후의 사항은 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