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사(開天寺)라고도 한다.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창건된 사찰로 추정된다.
이 절은 고려 태조가 국사의 예우로 모셨던 법경대사(法鏡大師) 현휘(玄暉)가 주지로 임명되어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다가 941년(태조 24)에 입적한 곳이며, 그의 뒤를 이어 홍법대사(弘法大師)가 후학들을 지도하였던 대찰이었다. 또한 이 절은 고려의 실록을 봉안한 사고(史庫)를 두었던 사찰로서 실록은 처음에 해인사에 두었다가 왜구의 침략으로 인하여 선산 득익사(得益寺)를 거쳐 이 절로 옮겼으며, 그 뒤 다시 죽산(竹山) 칠장사(七長寺)로 옮겼다가 1389년(공양왕 1)에 이 절로 옮겨 봉안하였다. 뒷날 세종이 고려사를 편수하기 위하여 실록을 서울로 이송하였는데, 이때까지 정토사가 현존하였음을 알려 주는 유일한 자료이다.
문화유산으로는 법경대사탑비(보물, 1963년 지정), 홍법국사탑(국보, 1962년 지정)과 탑비(보물, 1963년 지정), 법경대사 자등탑이 있다. 이 중 실상탑과 탑비는 1915년에 경복궁으로 옮겨져 보관되었고, 자등탑은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이 밖에도 약 70년 전에 절터 앞 언덕에서 운판(雲版) 하나와 불상(佛像) 1구가 출토되었다. 이 중 운판은 대장장이가 깨뜨려 쇠를 녹이는 도가니에 넣었는데 도가니가 폭발하여 즉사하였다 하며, 승려가 와서 불상을 집에다 두면 화가 온다고 하여 가져갔다고 한다. 현재 이 지역에는 정토사의 폐사에 얽힌 전설과 송도에서 조성한 법경대사비의 운반에 얽힌 전설 등이 전해지고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 초에 이숭인(李崇仁)이 이절의 풍경을 읊은 시가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