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양문파(鞭羊門派)의 승려. 전라북도 남원 출신. 성은 김씨(金氏). 자는 무회(無懷), 호는 용담(龍潭). 어머니는 서씨(徐氏)이다. 용이 승천하는 태몽을 꾸고 낳았으며, 생일은 사월초파일이다.
1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3년상을 지내면서 인생의 무상을 느껴 출가를 결심하였다. 어머니의 허락을 얻어 1718년(숙종 44)감로사(甘露寺)상흡(尙洽)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고, 태허(太虛)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721년(경종 1)부터 화엄사(華嚴寺)상월(霜月) 문하에서 수업하다가, 1723년 영남과 호남의 고승을 찾아 두루 편력하였다. 이때 영해(影海) · 낙암(洛庵) · 설봉(雪峯) · 남악(南岳) · 회암(晦庵) · 호암(虎巖) 등을 만나 선교(禪敎)를 궁구하여 명성을 얻었다.
행각을 끝낸 뒤 반조(返照: 고요히 삼매에 들어 자기를 돌이켜봄)에 전념하다가 지리산 견성암(見性庵)에서 『기신론(起信論)』을 읽고 홀연히 깨달았다. 그때 월저(月渚)의 고제(高弟: 제자를 높여 부르는 말) 수일(守一)이 찾아와 서로 문답하여 신기(神機: 정신과 근기)가 투합하였다.
1732년(영조 8) 지리산 영원암(靈源庵)에 들어가 토굴(土窟)을 지어 가은암(佳隱庵)이라 이름하고 만년의 안식처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사방 승려들의 간청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회문산 심원사(深源寺), 동락산 도림사(道林寺), 지리산의 여러 암자에서 『선문염송(禪門拈頌)』과 원돈교(圓頓敎)의 요지로 20년 동안 묘법(妙法)을 선양하였다.
1749년 겨울에 상월의 의발을 받았다. 1751년 겨울에 강석을 파했다가 문인들의 간청에 못 이겨 1758년 봄 지리산 대암(臺庵)에서 강석을 열었지만, 다음해에 다시금 파하였다. 1762년 6월 실상사(實相寺)에서 나이 62세, 법랍 44세로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수습한 사리 5과를 감로사 · 실상사 · 파근사(波根寺) 등에 탑을 세우고 나누어 봉안하였다.
50세 이후 의해지견(義解知見: 이치, 이해, 지식, 견해 등 논리적인 것)을 싫어하고 오로지 반조에 몰두했으며, 특히 만년에는 정토문(淨土門)을 즐겨 언제나 사람을 접할 때 ‘유심자성(唯心自性)’이라는 말을 하였다. 제자로는 성암(聖巖) · 혜암(惠庵) · 죽암(竹庵) 등 수십 명의 고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