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긍섭은 근대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활동하며 『암서집』, 『심재집』 등을 저술한 문인·학자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근(仲謹), 호는 암서(巖棲)‧심재(深齋)이다. 근대 개항에서 일제강점기까지 급변한 시대의 변화와 민족의 아픔을 겪는 와중에 학자로서의 삶을 영위해 나갔으며,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 지식인들과 교유하며 활발한 문학 활동도 펼쳤다.
조긍섭(曺兢燮)은 어린 나이에 『근사록(近思錄)』을 10일 만에 베껴 쓰는 놀라운 글재주를 보였다. 17세 때에는 당시 영남의 큰 선비였던 곽종석(郭鍾錫)을 찾아가 태극 · 성리 등에 관하여 토론을 벌였다. 1891년(고종 28) 19세 때에는 대구에서 열린 향시를 치르고 돌아오는 길에 이종기(李鍾杞)를 방문했다. 조긍섭은 20세를 전후로 장복추(張福樞) · 김흥락(金興洛) 등을 찾아가 학문에 대해 문답을 했다. 1895년(고종 32) 23세 때에는 『남명집(南冥集)』을 중간하는 사업에 참가해 여러 선배 문인들과 사귀었다. 1898년(고종 35) 26세 때에 사서(四書)에 대해 의문이 나는 점을 묻기 위하여 다시 김흥락을 만났다.
1910년(순종 4) 38세 때에 합병 소식을 듣고서는 두문불출하면서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동서의 학설을 비교 궁리하여 『곤언(困言)』을 저술하였다. 다음 해 6월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그러나 학문에 대한 열의가 식지 않아 「거빈해(居貧解)」 · 「성존심비변(性尊心卑辨)」 등의 논문을 작성하였다. 부친상이 끝나자 스스로 자기 자신을 다스리며 선비의 길을 걷고자 비슬산(E0025184) 북쪽의 정산(鼎山)에 은거하였다. 그 뒤에 문영박의 서재(書齋)인 광거당(廣居堂)을 오가며 학문에 몰두했다. 그리고 정산서당(鼎山書堂)을 지어 후학을 가르쳤다.
1919년 3월 「일본총독과 동포대중에게 보내는 글」의 초안을 잡다가 발각돼 17일간 구속을 당했다. 1928년 겨울에 문인들의 요청으로 정산에서 비슬산 서쪽인 쌍계(雙溪)로 거처를 옮겨 구계서당(龜溪書堂)을 짓고 후학을 계속 양성했다. 1933년 61세로 사망했다.
조긍섭의 『곤언』은 유학자로서 주체적 사고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글로 서양의 문화와 제도를 비판적으로 논의한다. 성리학적 저술로는 20세 때에 이진상(李震相)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을 17조목으로 분석하고 비판한 「독심즉리설(讀心卽理說)」,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을 인정하면서도 ‘심’은 곧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심문(心問)」, 그리고 전우(田愚)의 견해를 비판한 「성존심비변(性尊心卑辨)」 · 「성존심비적거변(性尊心卑的據辨)」 등이 있다.
조긍섭은 일정한 스승은 없었지만, 타고난 성품이 매우 영특하여 일가의 학문을 이루었다. 시문에도 법도가 있어 당시 영남 사림에서 거목으로 지목되었다. 한말 지식인 가운데에 황현 · 김택영 · 이건창 등과 교유했다. 그들을 뛰어난 인물로 칭찬했던 점으로 보아 유학자로서의 보수적 경향만을 고집하지 않는 학자였다.
저서로는 『암서집(巖棲集)』, 『 심재집(深齋集)』, 『조명록(措明錄)』, 『곤언(困言)』, 『복변(服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