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조기·보구치·수조기·부세·흑조기 등이 이에 속한다. 참조기는 몸이 길고 옆으로 납작[側扁]하며, 꼬리자루가 가늘고 길다. 등지느러미 연조부와 뒷지느러미에 거의 연변(緣邊)까지 비늘이 있다.
몸빛은 회색을 띤 황금색이며, 입이 홍색을 띠고 있는 점과 새강(鰓腔) 및 장간막(腸間膜)이 흑색인 점이 민어속과 구별되는 큰 차이점이다.
몸길이는 30㎝ 내외이다. 겨울에 제주도 서남방, 상해 동쪽의 난해(暖海)에서 월동한 뒤 북상하여 3월 하순에서 4월 중순경에 위도 칠산탄(七山灘)부근에 이르고, 4월 하순부터 5월 중순 사이에는 연평도 근해에 이른다.
6월 상순경에는 압록강 대화도 부근에 이르고, 하순에는 발해만에 도달하여 천해 간석지에서 산란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회유할 때 개구리가 떼를 지어 우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면서 물 위로 튀어오르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농밀한 어군이 일제히 소리를 낼 때에는 인근에서 배에 탄 사람들이 시끄럽게 느낄 정도이다. 보구치는 참조기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몸빛이 백색이고, 꼬리지느러미 끝이 참빗 모양으로 생긴 것이 다르다.
몸길이는 30㎝ 내외이다. 경상북도 이남의 동해와 서남 연해에 분포하고, 중국·대만 연해에도 분포한다. 수심이 40∼100m인 근해의 모래진흙 바닥에서 산다. 산란기는 5∼8월이다.
수조기는 몸이 비교적 길고 납작하다. 위턱이 아래턱보다 길고, 몸빛은 황적을 띤다. 각 비늘 줄을 따라 배열되어 있는 비스듬한 흑색띠는 옆줄의 위쪽에 있고 군데군데 중단되어 있다. 몸길이는 40㎝가 넘는다. 우리 나라 서남 연해와 일본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부세는 몸이 작은 민어와 유사하고, 몸빛은 적황색이다. 몸길이는 대개 50㎝가 넘는다. 남부 및 서남부 근해에서 중국 연해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흑조기는 몸이 민어와 비슷하나 구강(口腔) 및 새강이 흑색이다. 몸길이는 38.5㎝ 내외이다. 우리 나라의 다도해 이남과 일본·대만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훈몽자회≫에는 종(鯼)자를 ‘조기 종’이라 하고, 석수어(石首魚)라고도 하였다. ≪송남잡지 松南雜識≫에 의하면 머리에 돌이 있으므로 석수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조기라는 이름에 대하여 ≪화음방언자의해 華音方言字義解≫에는 우리말 석수어는 곧 중국어의 종어(鯼魚)인데, 종어라는 음이 급하게 발음되어 ‘조기’로 변하였다고 하고, ≪송남잡지≫에서도 종의 음이 조기로 변하였다고 한다.
≪고금석림 古今釋林≫에는 석수어의 속명이 ‘조기(助氣)’인데 이는 사람의 기(氣)를 도우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조기를 천지어(天知魚)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조기를 말려 굴비를 만들 때 항상 옥상에서 말리나, 접동새나 고양이가 감히 이를 취하여 먹을 수가 없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자산어보 玆山魚譜≫에는 석수어에 속하는 어류로서 ‘대면(大鮸), 속명 애우질(艾羽叱)’, ‘면어(鮸魚), 속명 민어(民魚)’, ‘추수어(蝤水魚), 속명 조기(曹機)’를 들고, 추수어 중 조금 큰 것을 보구치(甫九峙), 조금 작은 것을 반애(盤厓), 가장 작은 것을 황석어(黃石魚)라고 하였다.
대면의 큰 것은 주척(周尺)으로 10척 남짓 하다고 하였다. 그 모양은 면어와 유사한데 빛깔이 황흑색이라고 하였다. 3∼4월에 수면에 떠오르는 것을 어부들이 맨손으로 잡는다거나, 간에는 대독(大毒)이 있다고도 하는데 어떤 종류인지 알기 힘들다.
추수어에 대해서는 “큰놈은 1척 남짓하다. 모양은 면어와 유사하나 몸이 작으며, 맛도 면어와 유사하나 더욱 담백하고, 용도도 면어와 같다. 알은 젓을 담그는 데 좋다. 흥양(興陽) 바깥 섬에서는 춘분 뒤에 그물로 잡고, 칠산해(七山海)에서는 한식 뒤에 그물로 잡고, 해주 전양에서는 소만 뒤에 그물로 잡는다. 흑산 바다에서는 6∼7월 밤에 낚기 시작한다.(물이 맑기 때문에 낮에는 낚시를 물지 않는다.) 산란이 이미 끝났으므로 맛이 봄 것보다 못하여 어포로 만들어도 오래 가지 못한다. 가을이 되면 조금 낫다. 때를 따라 물을 쫓아오므로 추수어라 한다. 요즈음 사람들이 이를 그물로 잡을 때 그 어군이 내유(來游)하는 것을 만나면 산더미처럼 잡아 이를 모두 배에 실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는 참조기를 두고 한 말인 것으로 추측된다. ≪난호어목지 蘭湖漁牧志≫에는 석수어를 한글로 ‘조긔’라 하고 몸이 평편하고 비늘이 잘고 등은 담흑색이며, 몸 전체는 황백색이라고 하였는데 참조기를 말한 것이다.
조기는 우리 나라 동해에는 없고 서남해에서만 나는데 곡우 전후에 떼를 지어 남쪽으로부터 서쪽으로 회유하며, 이의 어획은 호남의 칠산에서 시작하여 해서의 연평해에서 성하고, 관서의 덕도(德島) 전양에서 끝난다고 하였다.
그 유통과 소비에 관해서는 상인들이 운집하여 배로 사방에 실어나르는데 소금에 절여 포로 만들거나, 소금에 담가 젓을 만들어 전국에 넘쳐흐른다고 하였고,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이를 좋아하며, 해족(海族) 중에서 가장 많고 가장 맛이 있다고 하였다.
조기어업의 역사는 매우 깊어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전라남도 영광군의 기사에 “석수어는 군 서쪽의 파시평(波市坪)에서 난다. 봄과 여름이 교차하는 때에 여러 곳의 어선이 모두 여기에 모여 그물로 잡는다. 관에서는 세금을 거두어 국용(國用)에 쓴다.”고 하였다. 황해도 해주목의 기사에서도 석수어는 주의 남쪽 연평평(延平坪)에서 난다고 하고, 어업실태에 대해서는 영광군과 동일한 내용을 싣고 있다.
이 때 이미 참조기의 주산지에서는 조기어업이 대성황을 이루고 있었고, 파시(波市)가 형성되어 있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선망(中船網) 같은 어망으로 잡았을 것이며, 어전(漁箭)에도 많이 잡혔을 것이다.
조기어업은 조선시대 전반을 통하여 성하였다. 전라도지방에서는 함경도의 명태처럼 많이 잡힌다고 하여 ‘전라도 명태’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기도 하였다.
19세기 말에 일본에서 안강망이 전래되자 어획능률이 크게 향상되어 많이 잡힐 때에는 한 그물에 4만∼5만 마리를 잡았고, 때로는 어망 속에 조기가 충만하여 끌어올릴 수가 없었으며, 어망이 파손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조기는 여러 가지로 가공되어 소비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굴비가 가장 유명하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증보산림경제 增補山林經濟≫에 의하면 소금에 절여 통째로 말린 것이 배를 갈라 말린 것보다 맛이 낫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굴비이다.
고려시대의 척신(戚臣) 이자겸(李資謙)이 왕을 모해하려다가 탄로되어 1126년(인종 4) 정주(靜州:지금의 영광)로 유배되었는데, 그 곳에서 굴비를 먹어 보고는 그 맛을 모르고 개경(開京)에 살았던 것을 후회하였다는 일화도 전한다. 정주굴비로 이름이 알려져 있던 영광굴비가 이미 고려시대부터 유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곡우 때 잡힌 산란 직전의 조기는 ‘곡우살 조기’ 또는 ‘오사리 조기’라 하여 가장 좋은 일품(逸品)으로 치고 있으며, 이것으로 만든 굴비는 ‘곡우살 굴비’ 또는 ‘오가재비 굴비’라 하여 특품으로 취급된다.
조선시대 문헌에 굴비·구비석수어(仇非石首魚)·구을비석수(仇乙非石首) 등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이 모두 굴비이다. 이는 공상품(供上品)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조기는 고온다습한 시기에 대량으로 어획되므로 그 보장방법으로 굴비와 같은 염건품(鹽乾品)의 가공법이 발달하였으며, 이는 우리 민족이 개발한 우수한 수산가공품의 하나로서 자랑할만한 것이다. 조기는 주로 기선저인망·선망·유자망·안강망 등으로 잡는다.
과거에는 자원이 풍부하여 전라도지방의 뱃노래에 “돈 실로 가자 돈 실로 가자 칠산 바다로 돈 실로 가자.”라는 노래가 있을 정도였으나, 지금은 남획으로 참조기를 비롯한 조기류의 자원이 감소일로에 있어 조기값이 금값으로 뛰고 있는 실정이다.
참조기를 예로 들어 근년의 연간어획량을 보면, 1980년에 48,843M/T을 기록한 이후 감소 경향을 보여 1986년에는 9,644M/T에 불과하였다.
어장범위가 확대되고 어획노력량(漁獲努力量)이 증대되고 있는 데도 어획량은 줄어들고 있다. 동물성 단백질의 주요 공급원의 하나로 역할을 담당하여 온 조기자원은 안정성이 높아 역사상 큰 자원 변동을 보이지 않았으나, 오늘날에 이르러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자원보호대책의 간구가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