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중례(仲禮), 호는 노강(蘆江)·도천(道川). 조시형(趙時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사 조현기(趙顯期)이고, 아버지는 조정서(趙正緖)이며, 어머니는 김성최(金盛最)의 딸이다.
1717(숙종 43)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이듬해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 봉교·정언을 거쳐 1734년 지평이 되었다. 정언으로 있을 때 왕이 시정하여야 할 3개조의 치민책(治民策)을 영조에게 올려 가납(嘉納)되었다.
1735년 지평 이태중(李台重)이 왕의 미움을 사 유배당한 사건이 발생하자, 일찍이 그를 한림직(翰林職)에 추천한 사실이 있었다 하여 함께 삭직되었다. 그 뒤 교리로 복직되었다가 소론 이광좌(李光佐)의 당으로 지목되어 2년간의 유배생활을 보냈다.
1740년 다시 기용되어 동부승지·의주부윤·대사성을 거쳐, 1746년 부제학에 올랐다. 이 때 『광묘어제훈사(光廟御製訓辭)』를 찬집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되고, 이어 동의금부사를 지냈으며, 도승지·이조참판·강원도관찰사·대사헌을 역임한 뒤 1755년 판윤으로 승진하였다.
이 때 왕명에 의하여 『천의소감(闡義昭鑑)』이 편찬될 때 찬집당상으로 참여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문집으로 『도천집』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