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구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한성부판윤, 이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경보(敬寶)
시호
문숙(文肅)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01년(순조 1)
사망 연도
1845년(헌종 11)
본관
풍양(豊壤)
주요 관직
판서|행호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한성부판윤, 이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경보(敬寶). 조경(趙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진두(趙鎭斗)이고, 아버지는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이며, 어머니는 맹숙춘(孟淑春)의 딸이다. 신정왕후(神貞王后: 追尊王 翼宗의 妃)의 오빠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22년(순조 22) 사마시에 합격, 음보(蔭補)로 세자익위사부수(世子翊衛司副率)가 된 뒤, 1827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저작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1829년 동지정사(冬至正使) 유상조(柳相祚)를 따라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한성부부사과와 겸문학을 겸하였으며, 책저도감교관(冊儲都監敎官)을 지내고, 1832년 좌부승지를 거쳐 대사성에 올랐다. 1836년(헌종 2) 이조참의를 거쳐 호조참판을 역임하고, 1840년 홍문관부제학·규장각직제학을 지냈으며, 그 뒤 금위대장·총융사·훈련대장·행호군 등을 역임하였다.

1844년 한성부판윤에 오른 다음 예조판서에까지 이르렀고, 이듬해에는 이조판서·공조판서에 오르게 되었다. 이 때 조병현(趙秉鉉)과 함께 풍양조씨 세도정치의 중심인물로 안동김씨(安東金氏)와 권력다툼을 벌이는 데 앞장서서, 삼촌인 조인영(趙寅永)이 순원왕후(純元王后 : 순조의 妃)의 호의로 영의정에 오르자 이에 합세하여 정치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그 뒤 비행이 폭로되어 규탄을 받게 되고, 조병현·조인영 등이 연달아 죽고 조씨일파 전체가 몰락하게 되자, 정권에서 축출되었다. 글씨로 이름이 났으며, 고종 때 조대비에 의하여 익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참고문헌

『순조실록(純祖實錄)』
『헌종실록(憲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운석유고(雲石遺稿)』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