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집중(執仲). 아버지는 통제사 조경(趙儆)이다.
일찍이 무예에 뛰어나 음보로 선전관이 되었고, 1768년(영조 44)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무관직을 두루 거친 다음, 1785년(정조 9)에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같은 해 3도수군통제사로 승진한 뒤, 좌포도대장·총융사에 이어 1789년에 수원부사로 임명되었다. 이 때 수원이 매우 중시되어 현륭원(顯隆園)을 옮겨오는 일, 도시규모를 확대하는 일 등 어려운 임무가 많았으나 이를 모두 차질없이 처리하여 큰 공적을 남기고, 1791년 훈련대장으로 직을 옮겼다.
그러나 한때 훈련도감의 야근상태가 극히 해이되어 있다는 과실로 인하여 책임자로서의 직무수행에 충실하지 못하였다는 죄목으로 죽산(竹山)에 유배된 일이 있었다.
그 뒤 총융사·금위대장·어영대장 등을 역임하였고, 1794년 승격된 수원부유수로 다시 등용되어 수원성 축성, 화성봉수대(華城烽燧臺) 설치 등의 방어시설은 물론, 호수를 중심으로 송림을 보호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조심태의 공헌은 적지 않았다.
두 차례에 걸쳐 전후 5년간을 수원지방관이 된 조심태는 왕으로부터 업적을 인정받아 논공행상에서 우의정 채제공(蔡濟恭)과 함께 가장 뚜렷한 공신으로 평가되어 전민(田民)을 상으로 받고 관계가 승자되었다.
1797년 이후 한성판윤·형조판서·대호군·장용대장(壯勇大將)을 지냈다. 무관으로서는 보기 드문 명필이었으며, 특히 대자(大字)에 뛰어났다.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무의(武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