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어구는 일반적으로 수산동물을 미끼로 유인하여 조침(釣針)에 걸리게 하는 어구라고 할 수 있다. 조어업은 일본조어업(一本釣漁業)과 연승어업(延繩漁業)으로 나누어진다.
일본조어업에 사용되는 조구류(釣具類)는 조어구를 조작하여 어획대상이 조침에 걸릴 때마다 끌어올려 어획하는 어구이며, 이는 ① 낚싯대를 사용하는 간조구(竿釣具:대낚시), ② 낚싯줄을 손으로 조작하는 수조구(手釣具:손줄낚시), ③ 낚시를 어선으로써 끄는 예승조구(曳繩釣具)로 재분류한다.
이 가운데서 예승조구는 대개 의이침(擬餌針: 꼬임낚시)을 사용하여 의이를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어류를 유인한다. 일본조 중에는 오징어일본조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미끼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도 있다.
그것은 밀집된 어군 속에 조침을 던졌다가 끌어올림으로써 어체가 조침에 걸리게 하는 조어구이다. 일본조는 와줄낚시라고도 한다.
연승류는 수평으로 설치한 한 줄기의 긴 간승(幹繩:모릿줄)에 조침이 달린 다수의 지승(枝繩:아릿줄)을 같은 간격으로 단 것으로서, 일정시간 동안 수중에 매달아두었다가 끌어올리는 조어구이다. 연승은 주낙이라고도 한다.
우리 나라의 조어업의 기원은 최소한 신석기시대까지 소급된다. 이는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 유적에서 조어구의 추(錘)로 사용되던 추석(錘石:봉돌)과 골각제의 조침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석기시대에 조어구를 발명한 것은 수렵에서 활과 화살을 발명한 것과 맞먹는 위대한 일이었다.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는 추석뿐만 아니라 각종 조침도 발견되었다.
인류가 최초로 발명한 조침은 직조침(直釣針)이었다. 뼈나 뿔을 잘라서 만든 작은 막대기의 양 끝을 뾰족하게 만들고, 중간 부분에 낚싯줄을 맬 홈을 판 것이 그 일반적 형태이다.
곧은 직조침과 낚싯줄이 일직선이 되게 하고 미끼를 이에 덮어 씌워놓으면, 물고기가 이를 단숨에 삼키고 도망가려고 할 때 조침과 낚싯줄이 T자형으로 되어 조침이 물고기의 목에 걸리게 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직조침은 우리 나라에서도 부산의 동삼동(東三洞) 신석기시대 패총에서 출토되었다.
직조침보다 발달한 조침이 오늘날의 조침처럼 굽은 곡조침(曲釣針)이다. 광복 후에 발굴된 함경북도 웅기 서포항(西浦項)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는 동물의 이빨을 갈아서 만든 곡조침들이 발견되었다.
오늘날의 조침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다. 조침의 기본형태는 신석기 시대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웅기의 송평동패총(松坪洞貝塚:빗살무늬토기문화에서 무문토기문화에 걸친 유적)에서 골조침(骨釣針)이 출토되었다.
미늘이 안쪽과 바깥쪽에 달린 특이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에 실시되었던 동삼동패총 발굴조사에서도 여러 개의 골각제조침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이 패총에서 출토된 조침은 앞서의 웅기유적 조침과 같은 단식조침(單式釣針)이 아닌 결합조침(結合釣針)이었다.
결합조침은 동삼동패총 외에도 여러 유적에서 출토되어 있다. 결합조침은 조침의 침 부분과 축(軸) 부분을 별도로 제작하여 양자의 기부(基部)를 묶어서 하나의 완성된 조침을 만든 것을 말한다.
완성된 조침의 형태는 V자형과 유사하나 축 쪽이 훨씬 길다. 침의 기부에는 축과 결합시키기 위한 접합구(接合溝)가 새겨져 있었다. 동삼동패총에서는 결합조침의 축 부분도 발견되었는데, 돌로 만든 것과 고래뼈로 만든 것이 있었다.
돌로 만든 축은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의 오산리신석기시대유적에서 대량으로 출토되었고, 남해안 도서지역에서도 출토되었다. 빗살무늬토기인이 조침을 결합조침 형태로 만든 것은 기능적인 필요성에 따른 것이거나 적절한 재료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재질의 제약을 극복하고 많은 대형조침을 제작하는 데는 결합조침이 적합하였을 것이다. 오산리유적의 석제축은 길이가 10.6㎝에 달하는 대형축이 있었다.
결합조침은 초대형조침에 속하는 것도 있었다. 신석기시대인들은 이러한 대형조침을 사용해 대구를 위시하여 큰 도미·삼치·넙치 등을 잡았을 것으로 보이며, 다랑어(다랭이 또는 참치)류도 낚았을 가능성이 있다.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에 이르러서는 청동제조침과 철제조침이 제조되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전라남도 영암의 청동기시대 후기유적에서 조침주조용 주범(鑄范)이 출토되었다.
대형조침 1개와 중형조침 2개를 주조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중형조침은 2개가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주조한 뒤에 끊어서 2개로 만들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철제의 조침은 초기 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의 유적에서 산발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1980년에 발굴된 김해 부원동(府院洞)패총에서는 미늘이 달린 철조침이 출토되었고, 함경북도 무산의 범의구석유적과 경산남도 삼천포의 늑도유적에서 초기 철기시대의 철조침이 출토되었다.
부산의 조도조개무지를 비롯한 남부 지방의 몇몇 원삼국시대 유적에서도 철조침이 발견되었다. 비교적 대형의 조침이며, 특히 조도패총 철조침은 지름 0.5㎝의 철봉을 구부려 만든 길이 약 10㎝의 대형철조침이었다.
이러한 철조침들은 대구와 같은 대형어를 낚는 데 사용되었을 것이다. 초기 철기시대에는 골각제조침이 철조침과 병용되고 있었다. 성산패총에서 녹각으로 만든 길이 11.4㎝의 각조침(결합조침의 축부분으로 보임)이 출토된 것은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서력 기원 전후의 시기에 있어서는 철기문화가 상당히 발달되어 지방의 가정에서도 각종 철기류가 사용되고 있었으므로 상당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철조침이 널리 보급되었을 것이며, 이에 따라 조어업의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을 것이다.
이 무렵에서는 여가생활로서의 조어(釣魚)도 성행하였던 것 같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59년(태조 7) 4월에 고안연(孤岸淵)으로 가서 관어(觀魚)를 하고 붉은 날개가 달린 흰 고기[赤翅白魚]를 낚았다고 한다. 이것은 이때의 사람들이 유어(遊漁)로서 조어를 하기도 하였음을 시사하는 것이며, 또한 조어업의 성행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신석기시대에 이미 상당한 기술적 수준에 올라있던 조어업은 질적인 면에서 어구·어법이 개량되고 양적인 면에서 조어업자 수가 늘어나면서 고려시대까지 꾸준히 발달하여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는 각종의 조어업이 행하여지고 있었음이 문헌자료로 실증되고 있다. 1447년(세종 29) 예조참의 이선제(李先齊)의 상서에는 각종 어법을 언급한 가운데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흐름을 따라 조어를 하기도 한다.”는 구절이 보인다.
이로써, 조선시대 초기에 어선을 타고 바다에 나가서 어류를 조획하는 외양성(外洋性) 조어업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에서는 망어업 대신에 조어업을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주목의 풍속조에는 “산이 험하고 바다가 악하여 망고(網罟)를 사용하지 않으며, 고기는 낚고 짐승은 쏜다.”고 하고 있는데, 제주도에서는 자연적 조건 때문에 조어업을 하였던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 후기의 어업을 대표하는 명태어업에서는 일찍부터 연승이 많이 사용되었다.
명태연승어업은 조선시대의 가장 중요한 조어업이었다.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에는 호남지방의 고등어조어업에 관한 설명이 보인다.
즉, 7월에서 10월에 이르기까지 저녁 때가 되면 어부들이 떼를 지어 해변에 나와 불을 밝히고 한 어선에 10여 명씩 승선출어하는데, 각자가 낚시대를 가지고 고등어를 낚는다고 하였다.
또 낚시줄의 길이는 10여 장(丈)이고 낚시줄은 면사를 사용한다는 설명을 부가하고 있다. 불빛을 좋아하는 고등어의 추광성(趨光性)을 이용해 고등어를 모이게 하고 이를 간조구로써 잡았던 것이다.
≪한국수산지≫ 제3집(1910)에 따르면, 한말에 완도지방의 고등어조어업에서도 이와 비슷한 어구·어법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보통 한 사람이 두 개의 조어구를 사용하였고, 세 개를 사용할 때에는 하나는 상투에 묶고 조업하였다고 한다.
≪한국수산지≫ 제1집 (1908)에는 대구연승, 준치연승, 민어예승, 삼치예승, 대구일본조, 농어일본조, 조기일본조, 도미일본조 등이 그려져 있다. 이들 조어구를 사용한 조어업이 한말에 성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하천조어구들도 소개되어 있다. 낚시줄은 마사(麻絲)나 면사가 사용되고 있었다. 조침은 자가제(自家製)를 많이 사용하였던 것 같다. 대구연승의 조침은 자가제라 하고 있고, 도미일본조 조침은 동선(銅線)을 이용해 집에서 만든다고 하였다. 이 무렵에는 조어업에 있어서도 일본의 조어업 어구·어법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초기의 연승어업은 주로 명태·도미·갯장어·붕장어·상어·대구·가오리 등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고, 일본조어업은 주로 명태·임연수어·갈치·조기·문어·고등어·삼치·도미·농어·감성돔·오징어 등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조어업자의 수는 급증했으나 조어업이 영세어업에 속하여 우리 나라 사람들이 조어업에 많이 종사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함경남도·함경북도의 명태연승어업, 전라남도와 서해안의 갈치일본조어업 및 갈치연승어업, 경상남도의 문어조어업 등이 조어업의 주요 종목들이었다.
조어업은 망어업에 비해 비교적 소자본으로 경영할 수 있고, 자재의 대외의존도도 낮으므로 광복 이후에도 일제강점기부터 있어 왔던 각종 조어업이 성행하였다. 연근해어장의 일본조어업은 오징어일본조(채낚기)어업이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그 어획고가 최고에 이르렀던 1968년에는 약 8만 5000M/T을 기록하였다. 연근해어장의 연승어업은 최근까지 주로 명태·상어·장어 등을 대상으로 하였다. 그러나 자원이 줄어들어 쇠퇴경향을 보이고 있다.
1988년의 연근해 연승어업 총 어획량은 2만 5721M/T에 불과하였다. 1995년의 연근해 연승어업 총 어획량은 3만 2640M/T이다. 광복 이후의 조어업은 원양어장에서 크게 발달하였다. 처음으로 원양에 진출한 연승어업은 상어연승어업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원양연승어업은 다랑어류를 대상으로 하는 원양연승어업이 신흥어업으로 크게 늘어났다.
다랑어연승어업은 1957년 제동산업주식회사 소속 어선 지남호(指南號)가 실시한 인도양 시험출어를 계기로 착수되었고,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크게 발달하였다.
이 어업은 우리 나라의 원양어업 개척에 선구적 구실을 하였다. 오늘날의 다랑어연승어업은 그 규모가 크다. 간승의 길이가 무려 100㎞에 달하며, 조침의 수는 2,000∼2,500개 정도에 달한다. 1988년의 다랑어류 어획고는 약 9만M/T에 이르러 외화획득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71년에는 새로운 원양조어업을 개척하기 위해 국립수산진흥원이 태평양 중서부 해역에서 간조구를 사용하는 가다랭이 채낚기어업시험에 착수하였고, 그 뒤 계속된 일련의 시험조업에서 성공을 거두어 현재는 이 어업이 새로운 원양조어업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