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개항정책을 취한 뒤 미국에 이어 서구 국가와 맺은 두 번째의 통상조약이다.
영국 함선이 최초로 조선에 통항(通航)한 것은 1797년(정조 21)원산 근해에 나타났던 영국의 어용선 프로비던스호(The Providence號)였다. 그리고 최초로 통상 교섭을 요청한 것은 영국 동인도회사의 지령을 받은 로드 아마스트호(The Lord Amherst號)였다.
이 배는 1832년(순조 32) 충청도 홍주 고대도(古代島) 부근에 1개월이나 정박하면서 통상교섭을 폈으나 조선의 쇄국정책으로 실패하였다.
그 뒤에도 영국 함선은 우리나라 연해를 탐방하며 계속해 통상을 요구해 왔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1860년 연해주(沿海州)를 영유하게 된 러시아 제국이 계속 남진정책을 취하게 되자, 영국은 동아시아에서의 영국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 조선과의 국교를 서둘렀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뒤 제1차 수신사 김기수(金綺秀)가 일본에 갔을 때 주일영국공사 파크스(Parkes,H.S.)는 그와 교섭을 폈으나 실패하였다. 1881년에 영국 군함 페거서스호(The Pegasus號)가 조선을 방문하고 교섭을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1882년 조미조약이 체결되자 주청영국공사 웨이드(Wade,F.F.)는 청나라에 적극적인 알선을 요청하였다. 이에 청나라는 의미인소약일자불개(依美人所約一字不改)라는 조건을 붙여 조선에 영국과의 통상조약 체결을 주선하였다.
이에 따라 영국은 윌스(Willes,G.O., 韋力士) 제독을 전권으로 조선에 파견했고, 조선정부의 전권대신 조영하(趙寧夏)와 인천에서 조영회담을 열었다.
이 회담에서 전14조로 된 조약원안을 6월 6일에 조인하고 별도로 다음과 같은 세 항목을 조회형식으로 인정, 설명하도록 약정하였다. 즉, 부산·원산·인천 3항의 사용과 영국군함의 항만 자유 출입과 연안 측량과 해도 작성의 허용을 양해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국정부는 이 조약이 「조일수호통상장정」과 비교해 ‘영국의 무역과 영국민의 지위보장이라는 견지에서 본 조약이 커다란 결함을 내포하고 있다.’는 이유로 비준을 거부하였다.
이듬해 주청영국공사 파크스를 전권대신으로 조선에 파견해 조선전권대신 민영목(閔泳穆)과 수정을 위한 교섭을 펴게 하였다.
그 결과 1883년 11월 26일 전문 13조의 「조영수호통상조약」과 부속통상장정 및 세칙장정, 선후속약(善後續約)의 조인을 보았고, 1884년 4월 28일에 비준을 교환하였다.
이 조약의 중요 내용은 조미조약의 체제를 모방했으나, 「조일통상장정」과 대조해 영국의 권익을 보장하는 데 치우친 점이다. 「조미통상조약」에 비해 영국 측에 유리하게 약정된 점들은 다음과 같다.
① 외교대표들과 영사들은 조선 국내를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고, 조선정부는 그들을 보호해야 하며, ② 치외법권의 철폐가 조선국왕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 영국정부의 판단에 의해 승인할 때 가능하게 약정했으며, ③ 부산·인천 이외에 한성(漢城) 및 양화진(楊花津)을 개항하기로 하고, ④ 개항장에서 영국민은 신교(信敎)의 자유를 누리며, ⑤ 일정 보행구역(步行區域)에서는 여권 없이 자유로이 내왕할 수 있으며, ⑥ 영국 군함은 개항장 이외에 조선 국내 어디서나 정박할 수 있고 선원이 상륙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한편, 영국은 일본이나 미국과 달리 조선에 전권공사를 파견하지 않고 총영사를 파견해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하는 외교적 농간을 부려 조선의 국위를 손상하게 하였다. 이후 독일과 러시아도 총영사만을 파견해 조선의 외교적 지위를 격하시키게 된 것은 바로 영국의 선례를 따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