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안(咸安). 초명은 용대(鏞大). 자는 사흠(士欽), 호는 복재(復齋). 진주 출신. 아버지는 의금부도사 조종규(趙宗奎)이며, 어머니는 하동정씨(河東鄭氏)로 사인 정동응(鄭東膺)의 딸이다. 일찍이 할아버지 조성가(趙性家)에게 수학하였고, 이어서 송병선(宋秉璿)·기우만(奇宇萬)·김평묵(金平默)을 사사하였다.
정효기(鄭孝基)·한유(韓愉)·하겸진(河謙鎭)·권재규(權載奎) 등과 교유하여 학문에 조예가 깊었으며,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이듬해 지리산 밑으로 이사하여 석실정사(石室精舍)를 짓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특히, 저술에 힘쓸 당시 한유·권재규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연부연연(然否然然)」을 지었는데, 태극동정설(太極動靜說)·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명덕설(明德說) 등 22조를 기정진(奇正鎭)의 학설인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에 기본을 두고 절충식 방법을 취하여 성리학적 견해를 간명하게 천명하였다.
또, 사서 중 요지가 되는 부분을 뽑아 주석을 붙인 「독서석의(讀書釋疑)」, 한말의 격변하는 과정에서 유학의 본질을 고수하기 위하여 쓴 「부정척사론(扶正斥邪論)」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저서로는 『복재집(復齋集)』 10권 4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