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두봉(斗峰)이고 창씨개명한 이름은 야마모토 겐칸(山本元煥)이다.
1892년 6월 24일 충청남도 서산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관립 임시교원양성소 제1부에 입학해 1914년 3월 졸업하였다. 졸업 직후인 1914년 3월 당진공립보통학교 훈도로 임명되어 근무하다가 1915년 3월 재판소 통역생 겸 서기로 자리를 옮겼다. 재판소 통역생 겸 서기로 근무하면서 1917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일본어·박물·수학 등을 가르쳤다. 1917년 12월 판임관 견습시험에서 합격한 후 1919년까지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 서기과 판임관 견습으로 재직하다가 1920년 경성지방법원 인천지청 서기과에서 통역생 겸 서기로 근무하였다. 1923년 경기도 내무부 지방과 및 사회과에서 사회주사로 1924년까지 지내다가 1925년부터 1935년까지 경기도 내무부 지방과 촉탁으로 재직하였다. 1933년 6월 일본 정부로부터 소화(昭和) 5년 국세조사기념장(國勢調査記念章)을 수여받았다.
1935년 이후 만주로 이주하여 1936년 3월 친일관변단체 흥아협회가 설립되었을 때 기관지인 『재만조선인통신』 발행과 협회 사무를 관장하기 위한 사무원으로 채용되어 사무장인 서범석(徐範錫)과 함께 흥아협회의 실무 역할을 맡았다. 『재만조선인통신』 창간호부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시 『재만조선인통신』에 기고한 글은 일제의 만주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하고 일본의 만주국 건설을 지지한다는 내용이다. 「갱생하는 재만조선인의 상황」(1936.4), 「색의를 입자」(1936.5), 「치외법권 철폐에 제(際)하여」(1936.6), 「만주국의 세제에 대하여」(1936.7), 「자족(自族)의 돈목(敦睦)없이 타족(他族)과의 협화(協和)는 무망(無望)」(1936.8) 등이 있다.
1936년 9월부터 흥아협회가 한인자제의 교육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하에 펑텐[奉天]시에 유일한 한인 중등교육기관인 동광학원(東光學園)을 설립하는데 깊이 관여하였다. 한인 천주교회를 건립하고 한인학교 연합회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천주교회 총회장, 학교연합회 이사로 활동하였다.
1936년 12월 무렵 일제가 만주를 침략한 후 재만조선인민회 후신으로 조선인 사회를 감시하고 통제하고자 세운 만주국협화회 펑텐민회 분회 상무원과 펑텐조선인청년단 단장으로 임명되면서, 흥아협회에서는 사무원에서 명예촉탁으로 지위가 바뀌었지만 『재만조선인통신』에 꾸준히 관여하였다. 만주에서 조선인이 일본국민으로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병역의무를 져야 하고 이를 통해 충량한 일본신민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의 글과 강연활동을 활발하게 벌였다. 일제의 내선융화와 황민화를 적극 선전하는 글로 「가네코 소장(小將)이 만주에서 직시해야 할 조선인을 읽고」(『재만조선인통신』, 1937.7), 「북지사변과 총후의 임무」(『재만조선인통신』, 1937.9), 『선만일여(鮮滿一如)와 민족협화』(만주공동인쇄주식회사, 1937.9), 『조선청년이여 일어나라』(만주제국협화회 봉천조선인청년단, 1937.10), 「자숙자계(自肅自戒)로 신용회복」(『재만조선인통신』, 1938.10), 「반영(反英)은 왜 하는가」(『재만조선인통신』, 1939.8), 「협화운동과 재만조선인」(『재만조선인통신』, 1939.9), 「총후 오등(吾等)의 임무」(『재만조선인통신』, 1939.12) 등이 있다. 1937년 7월 전후하여 만주국 펑텐시 공서(公署)에서 사회교육 주사로 일하였고, 주사로 재임하던 1940년 만주국에서 창씨제도를 설정하자 가장 먼저 야마모토[山本]로 창씨하는 등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였다.
해방 후 1949년 반민특위에 반민족행위자로 기소되어 한때 수감되었으나 그해 6월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수감되었을 때 같은 방에 수감중이던 대한감리교 총리사(總理師) 정춘수(鄭春洙) 목사에게 천주교를 전교하여 천주교 신자로 개종시켰는데, 당시 사회적으로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다. 1954년부터 명동성당의 총회장으로 천주교의 전교와 교리교육에 주력하였다. 1960년 조선기계제작소 사장이 되어 기업가로도 활동하였다. 1962년 서울 신당동성당의 전교회장으로 활동하다가, 명동 성모병원에 개설된 지성인 교리반의 강사로 나갔다. 그는 정치가·학자·법조인과 같은 사회지도층을 대거 천주교에 입교시켰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1961년 12월 장면내각(張勉內閣)의 국방부장관 현석호(玄錫虎), 상공부장관 한통숙(韓通淑), 재무부장관 김영선(金永善), 해군참모총장 정긍모(鄭兢模), 대법관 노진설(盧鎭卨), 국회의원 이석기(李錫基)·박순천(朴順天) 등 7명으로 천주교신자로 영세를 받았다. 제2공화국의 정부요인과 국회의원 같은 사회지도층이 대거 천주교에 입교한 것이 1961년의 5·16군사정변으로 정치일선에서 은퇴하게 되거나 수감된 정치적 배경도 있지만, 그의 지식인 전교는 유명하다. 천주교 관련 저술로 역서 『예수전』과 『진리본원』이 있다. 1964년 5월 17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