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朝會) 의식은 중국 고대로부터 시행된 이래 황제를 중심으로 집행되는 의례의 하나로 정착되어 갔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부터 조회가 시행되었다. 1012년(현종 3)에 상참관(常叅官)에게 5일에 한 번 알현하도록 했다는 규정이 있었는데, 고려 말까지도 대략 5일마다 조회가 행해졌던 듯하다. 이처럼 정기적으로 조회가 행해졌던 날은 아일(衙日)이라고 칭했고, 그에 따라 조참(朝參)은 아일조회(衙日朝會)라고도 일컬었다. 한 달에 6번씩 조회가 행해져서 육아일조회(六衙日朝會) · 육아일조참(六衙日朝參)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기도 했다. 다만 조선 건국 초에는 조회 운영이 부실하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권근(權近)이 명(明)의 제도를 참고하여 재정비할 것을 제안하였고, 이후 조참 의례의 관련 제도가 정비되어 갔다.
조참은 매일 행하는 상참(常參)과는 다르게 대략 5일이나 10일의 간격을 두고 정기적으로 열렸다. 상참에는 참여할 수 있는 관료의 범위가 제한적이었지만, 조참 때는 서울에 있는 모든 관리가 참석하였다. 그리고 상참 · 조참 모두 백관이 국왕을 알현하는 의례의 측면을 중시하였다. 다만 상참은 매일 행해져야 했으므로 의례가 간소했던 반면, 조참은 국왕에게 사배례(四拜禮)를 행하며 문안드리는 의례적인 측면을 중시하였다. 의례를 행한 후에는 국왕에게 정무를 아뢰며 의논하는 조계(朝啓)를 하기도 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조참은 매달 4차례(5·11·21·25일) 시행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조참 의식은 미리 날을 잡아 근정문(勤政門)의 중앙에 남향으로 어좌(御座)를 마련하고 좌우에 향안(香案)을 설치하며, 홍례문(弘禮門) 안에 악대(樂隊)를 배치한다. 2품 이상의 관원은 영제교(永濟橋) 북쪽 길 동편에 서고, 3품 이하는 다리 남쪽에 서며, 종친과 무관 2품 이상은 다리 북쪽인 길 서편에 선다. 등급에 따라 다른 위치에 여러 줄로 서나 북쪽을 향한 첫째 사람이 반수(班首)가 된다. 북이 처음 울리면 병조에서 노부(鹵簿) 등을 설치하고, 홍례문 안팎에 군대를 정렬시킨다. 북이 두 번 울리면 종친과 문무백관이 지정된 관복을 입고 사정전(思政殿) 문밖에서 지시를 기다린다. 통례(通禮)의 청에 따라 왕이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사정전에서 나오면 근시와 집사관이 먼저 사배(四拜)의 예를 올린다. 북이 세 번 울리면 문무백관이 지정된 위치로 돌아가고 왕이 여(轝)를 타고 나타나며, 악대가 풍악을 울린다. 왕이 자리에 앉으면 전의(典儀)가 부르는 구령에 따라 사배하고, 평신(平身)하면 의식이 종료된다.
조참이 제대로 시행되었다면 1년에 72회(1달에 6회)가 행해져야 맞다. 하지만 조참을 가장 많이 시행했다는 성종 때도 1년에 10여 회가 열리는 정도였다. 그 외 다른 국왕들은 연 10회에 한참 못 미치는 정도로 조참을 시행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에 조참의 시행 횟수는 더욱 줄었다. 영조 · 정조 재위기에 국정 논의 기능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조참이 조금 활성화되는 듯하였지만, 19세기 세도정치 시기가 되면서 더욱 드물게 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