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양아일(兩衙日)·사아일(四衙日)·육아일(六衙日) 등으로 지켜졌다. 아(衙)는 ‘백관이 조회하는 곳’을 뜻한다. 조참은 보통의 조회로서 정해진 날에 임금이 정전(正殿)에 친림해 백관의 조알(朝謁 : 왕을 뵘)을 받는다.
이 때 군신은 모두 상복(常服), 즉 임금은 익선관에 곤룡포를, 백관은 사모에 흑단령(黑團領)을 입었다. 『경국대전』 예전조를 보면 매월 초5일과 11·21·25일 등 백관이 네 번 조참했는데 이를 사아일이라고 하였다.
아일은 신라와 고려시대에도 존재하였다. 신라의 경우는 방언왕호(方言王號)인 마립간(麻立干)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립은 궐표(橛標)의 뜻이다. 궐표는 궁중에서 자리를 따라 정하므로 이는 곧 석차를 표시하는 표목, 즉 말뚝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립은 후세의 품석(品石)과 비슷한 것으로서 위에 임금이 아래에 신료(臣僚)들이 모이는 조회와 같은 형식을 취한데서 생긴 말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아일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당나라에서는 육아일 제도가 행해지고 있었다. 따라서 신라에도 마립제가 발전한 형태인 아일제가 당나라로부터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 『삼국사기』에 헌덕왕 때 평의전(平議殿)에 나아가 청정(廳政)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짐작이 간다.
고려시대에는 확실히 당나라의 육아일제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즉, 1370년(공민왕 19) 12월에 당시의 집권자 신돈(辛旽)의 요청으로 육아일을 한 달에 두 번, 즉 초1일과 26일에 왕이 시사(視事)하는 양아일로 변경한 기록이 보이고 있는 것이 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신돈이 실각한 뒤에는 다시 육아일로 돌아간 것 같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고려의 제도대로 처음부터 육아일제를 사용하였다. 그것은 1395년(태조 4) 11월에 간관 이정견(李廷堅)이 “우리 조정에 1월 육아일의 법이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조참일은 처음 초1·초6·11·15·21·26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1444년(세종 26) 10월에 『오례의주 五禮儀注』를 상정할 때 중국의 제도를 따라 초1·초5·11일·15·21·25일로 개정하였다. 그러나 세종의 건강 악화로 육아일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이대로 실시하지 못하다가 1454년(단종 2) 3월에 『오례의주』대로 시행하였다.
이것을 『경국대전』의 내용과 같이 사아일로 정한 것은 『경국대전』을 편찬하면서 그렇게 변경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