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이름은 마츠하라(松原羲聞)이다.
1858년 1월 3일 평안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1876년 3월 무과에 급제하여 1882년 10월 친군우영 초관, 1883년 6월 훈련원 주부, 12월 훈련원 첨정이 되었다. 1885년 6월 흥덕 현감, 1888년 3월 내금위장과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893년 12월 친군총어영 기사장이 되었고, 1894년 3월 청주 영장, 10월 경리청 참령관과 순무영 별군관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11월 군무아문 참령이 되어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동학농민군 진압에 종사하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1899년 4월부터 8월까지 일시 귀국하여 부산에 체류하다가 다시 일본에 갔다.
고종 황제 강제 퇴위 직후인 1907년 8월 귀국하여 9월에 특별사면을 받아 1907년 10월에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됨으로써 다시 공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908년 2월 제실회계 감사관, 6월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910년 10월 1일 총독부 설치와 동시에 조선총독부 황해도장관에 임명되어 1918년 12월 6일까지 재임하였다. 황해도장관 재임 중이던 1910년 12월 종5위에 서위되었고, 1912년 8월 1일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으며, 같은 해 11월 고등관 2등에 올랐고, 1913년 1월 30일 정5위에 승서되었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황해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장을 겸하였고, 1915년 11월 10일 일본 정부로부터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8년 4월 10일 종4위에 승서되었고, 같은 해 9월 23일 문관분한령에 의해 휴직하였고, 11월 29일 훈4등 서보장을 받았다. 특히 종4위 이상은 「서위조례」에 따라 작위에 준하여 예우를 누리기 때문에 종4위에 승서된 것은 남작 작위에 준하는 예우를 받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어 도장관 퇴직과 같은 날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에 임명되었다. 중추원 참의 재임 중인 1920년 11월부터 12월까지 중추원의 일본시찰단에 참여하였다. 1921년 4월 28일부터 새로 개편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다시 임명되어 1941년 사망할 때까지 칙임관 대우 참의로 재직하였다. 1923년부터 4년간 한성신탁주식회사 감사로 재직하였고, 1925년 1월부터 1929년 5월까지 동민회 평의원이었다. 동민회는 1924년 4월 15일 조선인의 반일적 성향 강화 등에 대항하기 위해 내선융화를 내걸고 결성된 대표적 친일단체이다. 1925년 2월 훈3등 서보장, 1928년 11월 16일 대례기념장, 1935년 10월 조선총독부 시정25주년 기념표창을 받았다. 1929년 5월 조선박람회 평의원이 되었고, 1933년 7월 조선중추원 중추원 회의에서 시정연구회 제도부 주사 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41년 3월 21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