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부는 종가의 맏며느리이다. 크고 작은 문중의 맏아들을 종손이라고 부른다. 종손의 부인이자 그 종손이 속한 종가의 맏며느리를 종부라고 한다. 조선 후기에 가족 집단이 형성되면서 그 가문을 운영하는 여성의 대표자로서 종부의 존재가 부각되었다. 종부의 가문 내 역할은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으로 대표된다. 종부의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은 가문의 유지와 번성을 위해 아들을 생산하는 일이다. 근대에는 종가의 의미가 쇠퇴하면서 종부의 역할은 남아 있으되 그에 상응하는 권리가 축소되어 종부로서의 위치가 약화되었다.
종부는 본래 중국 고대 종법에서 ‘대종자(大宗子)의 부인’이라는 뜻이었다. 종법은 적장자(嫡長子) 상속의 가족 예법을 말하는데, 여기에서 종자(宗子), 종부 등의 개념이 나타났다.
종법에서는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으로 친족 집단을 나누고, 대종은 백세불천(百世不遷) 즉 세세토록 이어지는 집안으로 규정하고 소종은 5세(五世)까지의 집안을 뜻한다.
중국의 봉건제 하에서 제후의 맏아들은 제후가 되지만, 그 외의 아들들은 제후가 될 수 없으므로 대종이라는 집단을 만들어 종족을 이어나가도록 하였다. 그런데 대종에서 맏아들은 대종을 이어가지만, 맏아들이 아닌 아들들은 역시 또 분리되어 나올 수밖에 없는데, 이들을 위해 소종 집단을 두게 되었다.
대종이나 소종 모두 친족 집단의 단위로 적장자 상속을 기본 요소로 한다. 본래 종자라고 하면, 대종자 즉 대종의 맏아들을 말하는데, 봉건제 쇠퇴 이후 사대부 중심의 소종이 중요해지면서 소종의 맏아들도 종자로 부르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불천위(不遷位)를 모시는 대종이나 5세 중심의 소종이나 모두 대표자를 종자 혹은 종손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들 종손이 대종이든 소종이든 그 문중의 중심으로 집안을 운영해 나갔다. 말하자면 크고 작은 문중의 맏아들을 종손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종부 역시 처음에는 ‘대종자의 부인’ 즉 대종의 맏며느리였지만, 점차 소종의 종자 부인도 종부로 불리게 되었다. 이처럼 종부는 종법적 질서에 의해 부여된 위치 또는 직위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선 후기가 문중 중심 사회였던 것을 고려하면, 종부는 단순히 문중 내 여성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질서 상 부여되는 종부라는 직위를 담당하는 것이다. 즉 종손과 함께 가문을 이끌어갈 책임을 맡는 파트너이다.
『예기』 내칙에 의하면, “종부는 제사 지내고 빈객을 맞을 때 모든 일을 시어머니에게 물어서 해야 하고, 일반 며느리들[개부(介婦)]은 종부에게 물어야 한다.”고 하고, 또 “일반 며느리들은 종부와 맞설 수 없고 나란히 걸어서도 안 되고, 또 나란히 앉아서도 안 된다.”고 하였다. 종부의 권위를 보여주는 구절이다. 종자와 함께 종가의 주인이며 대표자라는 사실을 잘 알려준다.
조선에서 종부의 가문 내 역할은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으로 대표된다. 대종 · 소종을 막논하고 가문 유지의 기본 틀이라고 할 수 있는 제사 지내기, 손님 접대를 담당해야 하였다.
제사는 집안 연속성의 핵심이고, 손님 접대는 가문의 품격 유지를 위해 필요하였다. 특히 봉제사는 집안의 통합과 화합을 위해 중요하였고 그 원활한 수행을 위해 종부에게는 막강한 권위가 부여되었다.
제사를 지낼 때 『예기』에서 말한 바와 같이 종부는 모든 것을 통솔하고 일반 며느리들은 종부의 지시를 따라야 하였다. 종법적 질서에 의해 부여된 위치인 만큼 종부는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때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종부의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은 가계계승을 위해 적자를 생산하는 일이다. 가문의 유지와 번성에 일차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종부가 언제나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아들이 없을 수도 있는데, 이때는 입후(立後)라고 하여 양자를 들였다. 양자를 들일 때 이미 남편인 종자가 죽고 없는 경우에는 종부가 대표성을 갖고 입후(入後)를 주도하였다.
종부의 위치가 갖는 중요성 때문에 각 가문에서는 종부를 선택할 때 매우 신중하였다. 우선 아는 집안에서 종부를 데려오는 경우가 많았다. 흔히 이를 연혼(連婚)이라고 하는데, 한번 이상 혼인해본 경험이 있는 잘 아는 집안 딸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종가의 딸[종녀(宗女)]을 데려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즉 종가에서 자란 딸은 종가의 생활을 보고 배웠기 때문에 종부 역할을 보다 잘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따라서 종부자리를 위해 종녀를 선택하는 경향은 서로 다른 두 종가 집안이 여러 차례에 걸쳐 혼인을 하는 연혼이나 중복혼 현상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종가의 의미 쇠퇴하면서 종부는 역할의 남아 있으되 그에 상응하는 권리가 축소되어 종부로서의 위치가 약화되었다. 따라서 몇몇 유수한 종가를 제외하고는 점차 종부의 역할도 사라지는 추세에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200~300년에 걸쳐 지속된 종부의 역할과 경험은 오늘날 한국 여성이 여러 분야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고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