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시조 온조왕이 고구려에서 한수(漢水)유역으로 이동하여오자 마한왕은 동북 100리의 땅을 할양하여 거주하게 하였다. 그 뒤 백제는 강성해져 6년(온조왕 24)에 웅천책(熊川柵)을 설치하는 문제로 마한과 국경분쟁을 일으키고, 8년에는 마한의 쇠약을 틈타서 기습공격하여 그 도읍을 함락하고 병합하였다.
이 때 마한의 원산(丹山)·금현(錦峴)의 두 성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지만 결국 백제의 맹공격으로 이듬해 4월에 함락되고 그 성의 백성을 한산(漢山) 북으로 옮겼다. 이에 마한은 멸망하게 되었다고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369년(근초고왕 24)에 마한이 멸망하였으니 이 때의 마한의 멸망은 완전멸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마한의 패배와 남쪽으로의 후퇴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16년에 마한의 장군 주근이 마한의 부흥을 도모하여 우곡성(牛谷城)에 웅거하여 백제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백제 정벌군에게 패배하자 주근은 목매어 자결하였다. 백제는 그 시체의 허리를 베고 가족을 처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