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남도 원산(元山) 출신. 본관은 신안(新安). 주승익(朱承益)과 조승숙(趙承淑) 사이에 3남매 중 외아들이다. 1941년 일본 쥬요대학(中央大學) 전문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43년에 일본 고등문관시험(高等文官試驗)에 합격하였으며, 1944년 같은 대학 법학부를 중퇴하였다.
광복이 되자 청주지방검찰청 검사로 임명되었고, 1947년 충주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승진하였으며, 1948년 전주지방검찰청 차장검사, 1952년 대구고등검찰청 검사를 역임하였다. 1953년에는 감찰위원회(監察委員會) 감찰국장에 임용되었다. 다시 1955년에 검찰직에 돌아가 청주지방검찰청 검사장, 춘천지방검찰청 검사장을 각각 역임했다.
1957년 전주지방검찰청 검사장, 1958년 법무부 검찰국장 겸 대검찰청 검사를 역임하다가, 1960년에는 대검찰청 검사와 1962년에 대검찰청 차장검사, 1963년에 대구검찰청 검사장, 1964년에는 다시 대검찰청 차장검사 등을 지냈다. 1964년에 검찰계를 대표하여 대법원 판사에 취임, 재판업무에 종사하다가, 1969년에 서울에서 변호사업을 개업하였다.
그는 소박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법관생활을 일관하였다. 이러한 그의 성품은 대법원 판사 때 1968년 7월 국내외로 시끄러웠던 ‘동백림 간첩단사건’의 주심판사를 맡아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환송한 판결을 내려 본의 아니게 용공분자로 몰려 곤욕을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