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생. 1920년 수원농림전문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학생시절 농학에 깊은 관심을 남달리 가졌으며, 특히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일제에 항거하는 학생운동의 선봉이었으며 필재가 뛰어났다. 이러한 연유로 하여 졸업 후에는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하여 경상남도 양산으로 피신, 은거생활을 하면서 이론과 실천을 겸한 농촌운동을 전개하였다. 김택순(金宅順)과 혼인하였고 자녀는 1남2녀를 두었다.
1925년부터 1935년까지 북청농업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1936년부터 모교인 수원고등농림학교의 농학과에서 작물학 강좌를 담당하였다. 8·15광복을 맞아 사회질서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하여 수원전역을 관장하는 수원치안대가 조직되었는데, 그 대장에 추대되어 약 1개월 동안 활동하였다.
광복 후에도 모교에 근속하면서 1960년 4월까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서 농학원론과 작물학 등의 강좌를 담당하는 한편, 농학과장·학장서리 등의 보직을 맡았다. 『수도작(水稻作)』·『전작(田作)』·『공예작물(工藝作物)』·『사료녹비작물(飼料綠肥作物)』·『재배학범론(栽培學汎論)』 등을 편집, 감수하여 대학의 농업전문교육에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우리나라 재래농법의 과학성을 토대로 한 작물학의 정립에 공헌하였다. 1960년 4월부터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1961년 6월 충북대학 학장으로 취임하였고, 1962년에 정년퇴임하였다. 1962년부터 1969년까지 한국작물학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한국작물학회 고문, 한국농업과학협회 부회장 등도 역임하였다. 그뒤 한국농약주식회사 상임고문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