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지장보살을 모셨던 사찰로서, 지금도 이 일대를 지장골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이곳을 중심으로 6개소의 암자가 있었으며, 전성기에는 승려가 많아 쌀을 씻는 물이 절에서 3㎞ 떨어진 문백까지 흘렀다고 한다.
채지홍(蔡之洪 1683~1741)이 이곳에서 지은 시 한 수가 그의 문집인 『봉암집(鳳巖集)』과 진천의 읍지인 『상산지(常山誌)』에 전하고, 1783년(정조 7)에 그의 아들 채백휴(蔡百休)가 이 절에 머물며 5개월 동안 아버지 문집을 간행하였다. 절의 폐사에는 영일정씨(迎日鄭氏)와 관련된 일화가 전래된다. 영일정씨가 이 절의 뒷산에 묘를 쓰려 하자 비구니들이 이를 저지하여 싸움이 붙었으나 결국 정씨들에게 지고 말았다. 정씨들이 묘를 쓴 다음날 승려들이 일어나 보니 불상은 땀을 흘리고 있고, 방에는 빈대기둥이 두개나 생겨났으므로 승려들은 살 수 없어 그곳을 떠났고 사찰은 폐허가 되었다 한다.
현존하는 유물로는 1576년(선조 9)에 만든 큰 맷돌이 남아 있는데, 귀중한 민속자료로서 평가받고 있다. 맷돌과 가까운 거리에는 백운당(白雲堂)의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가 도괴된 채 방치되어 있다. 높이 185㎝, 둘레 약 4m의 부도를 주민들은 ‘독부독’이라 부르는데, 30년 전에 다시 세우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