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식 병풍체로 꾸미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진주는 예로부터 성을 중심으로 발전해온 도시로서 백제가 변한으로부터 차지하였을 때는 거열성(居列城)이라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만흥산성(萬興山城)을 쌓고 진주라고 불렀으며, 태조 때에 진양(晉陽)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임진왜란에 이르러 가장 치열한 격전지로 부각되었다. 「진양성도」는 「평양기성도」와 아울러 지도산수화의 쌍벽을 이루고 있는데, 그 규모는 「평양기성도」보다 작다 하더라도 공통된 성격이 뚜렷하게 발견된다.
이 그림에는 남강(南江)과 산성을 중심으로 옛 시가지와 산성·성문 등이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고, 촉석루(矗石樓)·서장대(西將臺) 등 이름난 고적들이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어서 근래에 산성을 복원할 적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유존되는 지도산수 자료를 정리하여 보면 기성·진양성·북한산성·고성 등 성을 중심으로 그려졌다. 대개 고지도들이 군사용으로 쓰여진 흔적으로 미루어 보아 「진양성도」 역시 원래는 군사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