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8년(세종 20) 상호군(上護軍)·대호군(大護軍)·호군(護軍)의 사령(使令)을 맡기기 위하여 처음 설치되었다.
경차비군(京差備軍)은 각 읍의 충찬위(忠贊衛)로서 선발하였으며, 종별로는 국왕이 성중에 거둥하거나 전좌(殿座)할 때의 철추(鐵椎)·독(纛)차비, 진하례(陳賀禮) 때의 철추·독·용봉선(龍鳳扇)·청홍개(靑紅蓋)·거함(擧函)차비, 창방(唱榜) 때의 사화(賜花)차비, 선원록(璿源錄) 및 실록을 가지고 갈 때의 오장(烏杖)차비, 공주·옹주 혼례 때의 집안(執雁)차비, 사직 제향 때의 신여(神轝)차비, 사절 접대 때의 황의장(黃儀仗)차비, 과거시험 때의 수협(搜挾)차비, 영정(影幀) 봉안 때의 시(時)차비 등 그 종류가 다양하였다.
이들은 병조 유청군(有廳軍)에 소속되어 1년에 한차례 번을 들었다. 그러나 오위체제가 갖추어지면서 중앙의 차비군은 소멸되고 보병(步兵)이 그 임무를 맡게 되었다. 대신에 각 지방의 진관체제에 입각한 차비군이 나타났다.
1464년(세조 10) 각 영(營)과 진(鎭)의 차비는 진군(鎭軍)이라 불리다가 차비군으로 개칭되었다. 이들에게는 보(保) 1인이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