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경(王京)모량부(牟梁部)사람이다. 영이하고 용맹과 절개로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610년(진평왕 32) 그의 명성과 재주를 인정한 진평왕에 의해 발탁되어 가잠성(枷岑城)현령(縣令)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10월 백제무왕이 대군을 동원해 가잠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자 100일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진평왕은 장수에게 명해 상주(上州 :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하주(下州 :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신주(新州 : 지금의 경기도 광주)의 군대를 거느리고 구원하게 했으나, 백제군과 싸우다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에 찬덕이 비분강개해 말하기를, “3주의 군대가 적이 강한 것을 보고 성이 위태로운데도 구원하지 않고 물러가니, 이는 의(義)가 없는 짓이다. 의가 없이 사는 것보다는 의가 있게 죽는 것이 낫다.” 하고는 발분하여 공방전을 감행하였다. 그러다가 양식과 물이 떨어지자, 시체를 먹고 오줌을 마시며 성을 죽음으로 지켰다.
612년 정월 무기가 다하고 힘이 다하자, 하늘을 우러러 고함치기를, “우리 임금이 나에게 한 성을 맡겼으나 능히 보전하지 못하고 적에게 패하게 되었다. 죽어서라도 큰 악귀가 되어 백제사람을 다 물어 죽여 이 성을 수복하리라.” 하고 달려나가 느티나무에 몸을 부딪쳐 자결하였다. 이에 성은 함락되고 군사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아들 해론(奚論) 또한 충신이었다. 아버지 찬덕의 전공으로 대나마(大奈麻)가 되어 금산당주(金山幢主)에 임명되었다. 한산주도독(漢山州都督)변품(邊品)과 함께 대군으로 가잠성을 수복하기 위해 공격하자, 백제도 대군으로 반격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해론이 여러 장군에게 이르기를, “앞서 내 아비가 여기서 전사하셨는데 아들인 나도 지금 백제와 이곳에서 싸우게 되었으니 오늘이 내가 죽는 날이다.” 하고는 칼을 빼들고 용감히 적진으로 돌격하여 적군 여럿을 죽이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로써 부자가 장렬무비하게 한 성에서 전사하였다. 이를 듣고 진평왕은 눈물을 흘리며 예로써 장사하고 「장가(長歌)」를 지어 조위(弔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