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회 ()

근대사
단체
1908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되었던 의병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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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08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되었던 의병부대.
개설

1907년 8월 군대해산을 계기로 군인을 포함한 의병들이 대거 러시아 연추(煙秋) 일대로 망명하여 왔다.

이때 간도에서 의병 사포대(私砲隊)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한 바 있던 의병장 이범윤(李範允)이 거부(巨富) 최재형(崔在亨)으로부터 군량과 군자금을 제공 받아 의병진을 정비하고 있었다.

한편, 최병준(崔秉俊)·엄인섭(嚴仁燮) 등을 각지로 파견하여 의병을 규합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908년 3월 헤이그특사였던 이위종(李瑋鍾)이 가지고 온 1만 루블의 군자금으로 창의회를 조직하였다.

기능과 역할

이범윤이 총재가 되었으며, 초기 규모는 600여 명이었고, 사포대가 사용하던 무기와 러시아정부에서 마적방어용(馬賊防禦用)으로 주민들에게 제공하여준 엽총 등으로 무장하였다. 또한 일본군 1명을 사살하면 상금 15원을 포상하여 사기를 진작시키며, 군율을 엄히 하여 항일전에 대비하였다.

1909년 2월 국내진입을 꾀하여, 청나라 변무독판(邊務督辦) 오녹정(吳錄禎)에게 혼춘(琿春)지방을 통로로 사용하겠다고 통고, 양해를 구하였다. 그러나 오녹정이 청나라 영토를 통과하면 체포하겠다는 소식을 접하고부터는 의병활동이 용이하지 않게 되었다.

이 때 이범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유인석(柳麟錫)과 회합하고, 항일운동에 서로 협조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어 7월 최재형이 정예 200명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원의 신아산(新阿山)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전멸시켰다. 또한, 회령의 영산(永山) 등지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지도층 내부의 알력 및 무장항일의병계열과 애국계몽운동계열간의 투쟁 방법과 목적상의 차이가 심화되면서, 마침내 최재형에 의한 이범윤암살미수사건으로 비화되어 해체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뒤 최재형·엄인섭 등은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였고, 이범윤은 유인석·차석보(車錫甫)와 함께 성명회(聲鳴會)를 조직하여 의연금 모금과 일제강점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의의와 평가

창의회의 항일투쟁정신과 인맥은 의군부(義軍府)로 이어졌으므로 국내의병운동의 공간적·시간적 확대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의 연계를 실현 가능하게 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참고문헌

『기려수필(騎驢隨筆)』
『매천야록(梅泉野錄)』
『일제하독립운동사연구(日帝下獨立運動史硏究)』(박영석, 일주각, 1984)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김후경, 광복출판사, 1983)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Ⅰ(국사편찬위원회, 1969)
『한국독립사(韓國獨立史)』(김승학, 독립문화사, 1965)
『무장독립운동비사(武裝獨立運動秘史)』(채근식, 대한민국공보처,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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