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강(平康). 일명 채형세(蔡衡世). 호는 거평(居平). 평안남도 영원 출신. 채병묵(蔡秉默)의 아들이다.
고향에서 의명소학교(義明小學校)를 졸업하였다. 1910년 서울의 오성학교(五星學校)에 입학했으나 학교가 폐쇄되자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에서 4년간 복무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적극적으로 가담한 뒤, 탈옥 도주해 만주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로 망명해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훈련책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통의부(統義府) 대표로 김창환(金昌煥)·심용준(沈龍俊) 등과 함께 상해(上海)로 파견되어 국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임시정부지령으로 중국 뤄양육군강무학교[洛陽陸軍講武學校]에 파견되어 한국인 유학생의 지도책임을 맡았으며, 중국의 직봉전쟁(直奉戰爭)에 참가해 실전경험을 쌓았다. 1925년 임시정부로부터 육군대위로 임명되었으며, 임시의정원 평안대의원(平安代議員)에 피선되었다.
1926년 임시정부로부터 참의부군무위원(參議府軍務委員)에 임명되고, 1927년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에 파견되어 유학생을 지도하였다. 1930년 이후 중국육군제59사 작전참모, 중국육군제2사 참모처장, 교도단장, 중국제19집단군 총사령부 작전참모, 중국육군제78사 참모장 등 중국군의 작전관계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42년에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장에 취임하였다. 1944년 광복군 제1지대장으로 전임해 초모활동·대적선전공작·정보수집·유격전 전개 등에 온 정열을 쏟다가 조국의 광복을 맞았다.
교포의 재산 보호 및 안전 귀환에 노력하다가 1946년 12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49년 육군사관학교 3기특과(三期特科)를 나온 뒤 연대장·사단장을 거쳐 1950년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