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제공 선생 영정 ( )

채제공 초상
채제공 초상
회화
작품
문화재
조선후기 문신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을 그린 초상화.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보물(2006년 12월 29일 지정)
소재지
경기도 수원시
정의
조선후기 문신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을 그린 초상화.
구성 및 형식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化城面) 구재리에 있는 상의사에 봉안되어 있는 이 영정은 비단 바탕에 채색으로 그림 크기는 145×78.5㎝이다. 비단은 올이 약간 굵고 조직이 다소 성근 통견을 사용했다. 아교와 백반을 많이 섞어 반짝임이 많은 편이다. 그리고 정조대의 송식(宋式) 족자 표구이다. 현재 이 영정을 포함한 초상3점, 초본3점, 향낭1점, 함2점이 일괄로 2006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도상은 조복(朝服)을 착용하고 금관을 쓴 뒤 상아홀을 든 채 반우향으로 앉은 전신(全身) 의좌상(椅坐像)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조선 시대의 초상화 중에서 그 예가 드문 모습이다. 통상 호피를 깐 교의자(交椅子)에 앉아 의답(椅踏) 위에 발을 올려놓는 것과 달리 의답도 없이 양털을 깐 낮은 의자에 앉아 있는 것도 다소 색다른 모습이다.

바닥에는 화려한 화문석 문양을 정교한 평행 사선 투시로 그려 넣어 화면 전체에 깊이감이 두드러진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18세기 후반의 초상화에서 가장 잘 나타나는 특징적인 모습이다.

얼굴은 분홍색 배채(背彩) 위에 농담의 변화가 많은 갈색선으로 윤곽선과 주름선을 잡았다. 그 다음 붓끝에 갈색을 약간 묻혀서 짧은 필선을 수없이 비비듯이 덧긋고 엷은 갈색으로 우려서 매우 정교한 명암을 표현하는 필묘법(筆描法)을 구사하였다. 특히 눈 밑의 누당(淚堂) 부분과 뺨 부분에 이런 필묘법의 흔적이 잘 나타나 있다. 주름선의 필선이 18세기 초중반경보다는 다소 약한 편이기도 하다. 하지만 주름선 옆의 명암을 주름선과 거의 같은 농도로 넣었기 때문에 언뜻 보면 주름선의 갈색 필선이 없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조복도 세밀하게 옷주름 선을 잡고 붉은색을 후채하였다. 그 뒤 다시 위에서 붉은색을 짙게 칠하였다. 그 다음 옷주름 선 주변을 더욱 붉고 어둡게 여러 번 칠해서 매우 정치하게 명암을 표현했다. 신체의 양쪽 옆 부분은 중앙 부분보다 더욱 어둡게 명암을 넣어 몸이 뒤쪽으로 돌아가며 넘어가는 미묘한 모습까지 매우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내용 및 현황

채제공의 영정은 현재 4본이 알려져 있다. 나주(羅州)미천서원(眉川書院) 소장의 흑단령본(黑團領本)은 분실되어 지금은 사진만이 전한다. 1791년이명기(李命基)가 그린 단령(團領)의 부좌상(趺坐像) 1본이 수원시에 소장되어 있으며 흑단령본 1본이 부여(扶餘)의 도강영당(道江影堂)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금관조복본(金冠朝服本)이 이 영정이다.

또한 상반신 유지(油紙) 초본(草本) 3점이 전한다. 이 중 2점은 유탄(柳炭)과 먹으로 초를 잡은 1784년 65세 때의 모습을 그린 것이고 나머지 1점은 이명기가 정조의 명을 받아 분홍색 배채(背彩) 위에 유탄과 먹 및 호분(湖粉: 흰 가루)으로 초를 잡아 1791년 72세 때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영정은 그 중 가장 화려하고 정교하다. 화면 오른쪽에는 “輔國崇祿大夫 行判中樞府事 兼兵曹判書 判義禁府事 知經筵春秋館事 弘文館提學 世孫左賓客 奎章閣提學 知實錄事 樊巖 蔡濟恭 伯規甫 六十五歲眞(보국숭록대부 행판중추부사 겸병조판서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 세손좌빈객 규장각제학 지실록사 번암 채제공 백규보 육십오세진)”의 표제가 있다. 여기서 채제공이 65세 때의 관직명이 적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1784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나주 미천서원 구장(舊藏)의 흑단령본에도 같은 내용의 표제가 동일 필체로 적혀 있어 이 두 본은 동시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 두 본에 채제공의 제자였던 이정운(李鼎運, 1743∼?)이 1799년에 쓴 자찬문(自贊文)은 『번암집(樊巖集)』에 실린 「자제사진찬(自題寫眞贊)」의 ‘조복본’ 및 ‘흑단령본’의 문장과 같기 때문에 이 두 본이 바로 체제공이 자제 찬문을 지었던 그 초상화일 것이라 추정된다. 또한 채제공이 조정에서 방척되었을 때 이명기(李命基)가 그렸다는 수심 어린 초상화가 바로 이 영정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정운이 작성한 자찬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생자찬 / 내가 그대인가 / 그대가 나인가 / 나는 내 몸 하나만을도 버거운데 / 그대는 어찌하여 다시 내가 되었단 말인가 / 큰 띠를 드리우고 홀을 바로잡고 / 해결한 것이 무슨 정책이었나 / 머리가 하얗게 되고 얼굴엔 주름이 지도록 / 이루어놓은 것은 무슨 일인가 / 태어나서 늙고 죽을 때까지 태평하니 / 나는 즐겁지만 그대도 즐거운가 // 문인 자헌대부 한성부판윤 연안 이정운 삼가 쓴다.[先生自贊 我是君耶 君是我耶 吾方患吾有吾身 君胡爲兮我 垂紳正笏 所決者何策 髮白顔皺 所成者何業 生老死太平 我而君亦否 聖上二十三年己未 仲秋 門人 資獻大夫 漢城府判尹 延安 鼎運 敬書]”

의의와 평가

이 채제공의 초상화는 특히 정조대에 절정에 달했던 사실주의적 시각 표현의 한 극점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관복 표현은 그런 모습을 더욱 잘 보여 준다. 즉 금관(金冠)과 그 양(梁)의 정교하고 세밀한 표현, 금관의 술 장식 매듭을 금관 뒤에서부터 목잠(木箴)에 걸어 다시 매듭 뒤로 한 바퀴 돌린 다음 어깨 앞으로 내려뜨린 자연스러운 표현이 그러하다.

또한 가슴 부근의 적라의(赤羅衣) · 적색폐슬(赤色蔽膝) · 사색금수(四色錦綬) · 서대(犀帶) · 상아홀(象牙笏)이 층층이 중복되면서도 빈틈없이 묘사된 공간적 층차의 미세한 표현, 청색 선을 두른 흰색 허리띠가 무릎에 걸쳐 꺾이면서 그중의 한 가닥이 가볍게 말리며 돌아간 표현, 상단(裳端 : 치맛단)이 늘어져 내리면서 의자와 무릎, 흑리(黑履) 등에 의해 접히고 말리는 표현 등도 매우 정교하고 사실적이다.

금관에는 호분을 두텁게 올리고 그 위에 금을 올려 매우 입체적인 채색 효과를 시도하였다. 조선 중 · 후기에 통상적으로 사용된 금분과 비교할 때 색감이나 질감이 다소 달라 혹 금박을 사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참고문헌

『한국의 초상화: 역사 속의 인물과 조우하다』(문화재청·눌와, 2007)
『초상화 연구』(조선미, 문예출판사, 2007)
『한국(韓國)의 초상화(肖像畵)』(조선미, 열화당, 1983)
『한국초상화(韓國肖像畵)』(통천문화사, 1979)
문화재청(http://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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