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봉화대에서 연기를 이용하여 긴급시에 신호를 하였는데, 날씨가 흐리거나 비올 때에는 주로 신포(信砲)를 이용하였다.
신포는 최무선(崔茂宣)이 화통도감에서 제조한 각종 화기(火器) 중에도 들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고려말부터 사용되었으며, 방포(放砲)실험에 대한 기록은 1425년(세종 7) 11월에 처음 보이며, 1428년(세종 10)에 전국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철신포라는 명칭은 1442년(세종 24)에 처음 보이며, 성능은 약 8㎞ 밖까지 소리가 들리는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존하는 것은 없다. 《국조오례서례》의 병기도설에 기록된 세종 때 철신포의 크기와 구조는 다음과 같다.
구조는 약통(藥筒), 격목통(激木筒), 취(觜), 부이(附耳)로 구성되어 있다. 약통은 화약을 넣는 곳으로 이곳에 점화선을 끼우는 구멍이 있으며, 한번 발사에 사용된 화약의 양은 13냥이었다.
격목통은 약통 속의 화약이 폭발할 때 폭발가스가 새지 않도록 막아주는 구실을 하는 격목을 박는 곳으로 약통과 취 사이에 있다. 취에는 아무 것도 넣지 않으며, 부이는 손잡이로서 철신포를 움직일 때나 화약을 장진할 때 사용하였다.
크기는 전체길이가 1척3촌3리(39.94㎝)이며 무게는 70근4냥이었다. 총구의 내경은 3촌2분3리(9.9㎝)였다. 《국조오례서례》의 설명과 그림을 이용하여 1979년채연석(蔡連錫)에 의하여 복원되어 행주산성에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