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에 위치한다. 1984년 12월 31일에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전주최씨 종중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는 윤근수(尹根壽), 이항복(李恒福), 신흠(申欽) 등 여러 문인들에게 수학하였다.
1605년(선조 38) 문과에 급제하여 광해군 때에 육조의 좌랑을 거치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적극 참여하여 공신이 되었다. 이후 정묘호란(丁卯胡亂),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대표적 주화론자(主和論者)로 활약하였고, 요직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묘역(墓域)은 약 200평의 평지에 조성되었다. 3기의 봉분이 품(品)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중앙 봉분이 최명길의 것이며, 좌측이 첫 번째 부인 인동장씨, 우측이 두 번째 부인 양천허씨(陽川許氏)의 봉분이다.
최명길의 봉분은 주위에 높이 50㎝의 호석(護石)을 둘렀으나, 인동장씨와 양천허씨의 봉분에는 호석이 없다. 세 봉분 중앙에 묘비와 상석, 향로석이 있고, 주위에 문인석 · 망주석이 있다.
묘표의 각자(刻字)는 남구만(南九萬)이 썼는데, 큰 글씨로 ‘조선상국 증시문충지천최공명길지묘(朝鮮相國贈諡文忠遲川崔公鳴吉之墓)’라고 되어 있고 왼쪽에 작은 글씨로 ‘영의정 의령남구만서(領議政宜寧南九萬書)’라고 되어 있다.
묘소 입구에 신도비가 있는데, 비신(碑身)의 높이 270㎝ · 폭 37㎝ · 전체높이 410㎝의 대형비석이다. 이 비석은 묘소와는 별도로 1980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으며, 1978년에 보호각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