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이며,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1933년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 1941년 경성고등상업학교(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전신)를 졸업하고, 1947년 뉴욕대학교 상과대학에 편입하여, 1949년 졸업하였다.
귀국 후 대한교역공사 업무부장, 1950년 동남아시아무역사절단 정부대표, 대한교역공사 이사장, 운크라(UNKRA) 주미한국대표 등을 역임하였으며, 1951년 대한교역공사의 해산과 함께 발족한 한국무역진흥주식회사 상무이사로 재직하였다.
1954년 민의원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공천되어 경기도 광주에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으나, 1955년 국제연합한국부흥위원회 뉴욕주재 한국대표, 1956년 외자청장이 되었다. 1958년 민의원선거에 입후보하여 자유당 소속으로 광주군에서 당선되었으며, 같은해 교통부 장관, 1959년 내무부 장관에 기용되어 3·15 부정선거를 총지휘하였다.
하지만, 1960년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같은 해 5월 3일 구속되었다. 조사결과 부정선거에는 자유당 소속 정치폭력배들이 동원되었고, 내무부 소속의 공무원들까지 조직적으로 개입하였음이 드러났다. 이 일로 내무부 장관 최인규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1961년 혁명재판부에서 3·15 정·부통령 부정선거를 지령한 혐의로 사형이 확정되어, 12월 서울교도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