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일지(逸之). 호는 석헌(石軒). 최효원(崔孝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잠(崔潛)이고, 아버지는 좌참찬 최상현(崔象玄)이며, 어머니는 충의위(忠義衛) 조여효(曺與孝)의 딸이다. 장유(張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32년(인조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46년 음보로 효릉참봉(孝陵參奉)이 되고, 이해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지평·교리·정언을 거쳐 1653년(효종 4) 홍천현감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충청우도추쇄어사(忠淸右道推刷御史)가 되어 당시 노비 등이 주인을 배반하고 내수사(內需司)에 소속되어 있던 것을 모두 추쇄하여 본 주인에게 돌려줌으로써 노비와 주인간의 분규를 거국적으로 해결하여 명성이 높았다.
이듬해 경성판관을 지냈고, 1659년 한산군수를 거쳐 1660년(현종 1) 장성부사가 되어서는 기민을 구제하는 데 힘썼다.
1665년 헌납으로 춘추관기주관이 되어 『효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다음해에는 각 관청의 물품출납을 서리(胥吏)에게만 맡기기 때문에 미포(米布)에 대한 농간이 있다고 하여, 반드시 책임자의 입회 하에 출납을 엄중히 해서 그 농간을 바로잡을 것을 진언하여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그 뒤 장령·집의 등을 거쳐 1672년 호조참의, 1677년(숙종 3) 좌승지·형조참의를 역임하였으며, 뒤에 병조·호조의 참판을 지냈다. 일찍이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숙종을 시강할 때, 숙종은 그의 청빈함을 가상히 여겨 초모(貂帽)를 하사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