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선일(善一). 세례명은 요한. 충청남도 공주 출신. 어려서 아버지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고, 1846~1847년경 다블뤼(Daveluy)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1866년 9명의 프랑스인 신부가 순교하는 병인박해가 일어나 리델(Ridel, 李福明)신부가 구원을 요청하기 위하여 탈출할 때 교우 0명과 같이 7월에 청나라로 건너갔다.
그 뒤 상해에 머물다가 1866년 9~10월의 병인양요 때에는 리델 신부와 함께 프랑스 함대의 물길 안내인으로 동행했고, 1868년 5월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고자 했을 때에도 페롱 신부와 함께 안내자의 역할을 하였다. 이후 만주 체푸와 요동반도의 챠쿠 등지에 머무르면서 『한불자전(韓佛字典)』·『한어문전(韓語文典)』 등의 편찬사업에 참여하였다. 1874년(혹은 1875년) 비밀리에 귀국한 뒤 집을 마련하는 등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을 준비하였다. 그런 가운데 1876년 블랑(Blanc, 白圭三)신부와 드게트(Deguette, 崔東鎭)신부를 영입하였고, 이듬해 리델주교와 로베르(Robert, 金保祿)신부 등을 맞아들였다.
재혼한 아내와 그들의 사목활동을 뒷바라지하던 중 1878년 만주에 파견된 교회의 밀사 최치화(崔致化) 등이 국경선에서 체포되면서 검거선풍이 불게 되어 리델주교와 함께 체포되었다.
리델주교는 프랑스의 외교적 압력과 청나라의 알선으로 6개월 후 국외로 추방되었으나 그는 그 해 7월에 70세의 나이로 포도청에서 옥사하였다. 편찬사업에 관여하였으며 그가 인쇄활자의 자모(字母)글씨를 써 준 『한불자전』과 『한어문전』은 각각 1880년과 1881년에 일본에서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