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19일 김해성을 함락시킨 일본군(黑田長政이 이끈 西路軍)은 추풍령을 향하여 북상, 공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당시 경상우방어사(慶尙右防禦使) 조경과 조방장(助防將) 양사준(梁思俊)이 경상우도지역의 관군을 이끌고 추풍역을 지키고 있었으나, 병력과 화력에 있어서 처음부터 적의 대군을 막아낼 수 없는 상황에 처하여 있었다. 이 때 설상가상으로 복병의 기습공격을 받은 관군은 일시에 패퇴하여 방어사 조경까지 일본군의 포로가 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반하여 방어사 휘하에 돌격장으로 있던 정기룡(鄭起龍)은 신장(神將)이라는 그의 별명대로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 깊숙히 뛰어들어 방어사를 구출해내는 동시에 적병 100여명을 사살하는 큰 전공을 세웠다.
그는 방어사 조경이 영남지방에 내려올 때 그 휘하에 종군할 것을 자청하여 돌격장이 된 뒤 거창의 신창전투(新昌戰鬪)에서 이미 많은 적병을 물리쳐 그 무용을 떨친 바 있었다. 그러나 정기룡의 용전에도 불구하고 추풍역전투의 결과는 관군의 패전으로 끝났고, 이로부터 추풍령 동부 경상도지방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