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조선 중기 문신 이상급의 신도비이다. 대석(臺石)과 비신(碑身)이 모두 8각형으로 이루어진 특수한 형태의 신도비로 보호각 안에 있다.
높이 68㎝의 8면 대석 위에 역시 각면의 너비 26㎝, 높이 200㎝의 비신이 있고, 다시 그 위에 68㎝ 높이의 4각 이수(螭首)가 얹혀 있다. 비신과 대석이 하나의 돌로 이어져 있으며, 대석에는 연화문을 새긴 점도 특이하다.
1714년(숙종 40)에 세웠으며,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지었다. 이상급이 풍기군수로 있을 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를 주창했던 정조(鄭造)가 관찰사로 부임하자 그 속관(屬官)이 될 수 없다고 하면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왔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다시 관직에 나갔으며,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扈從)했다.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묘사(廟社)를 받들고 들어간 형 상길(尙吉)을 찾아가던 중에 적병에게 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