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병 조형 유허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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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병 조형 유허비
취병 조형 유허비
서예
유적
국가유산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있는 조선후기 문신 조형 관련 유허비.
시도문화유산
지정 명칭
취병조형유허비(翠屛趙珩遺墟碑)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지정기관
광주광역시
종목
광주광역시 시도유형문화유산(1990년 11월 15일 지정)
소재지
광주광역시 광산구 비아안길 19 (비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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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있는 조선후기 문신 조형 관련 유허비.
내용

1990년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전체 높이 120㎝, 비신 높이 115㎝, 너비 90㎝, 두께 16㎝.

이 비는 그 형식이 특이하다. 비신이 이수와 1석이며, 비좌는 별석으로 되어 있다. 비신은 높이에 비해 너비가 너무 넓어 일반적인 석비와는 구별되고 있다. 이수는 우진각 지붕 모양이며 용마루와 내림마루의 우동은 큼직하고 낙수면은 약간 경사져 있다. 비좌는 직사각형이며 2단을 이루고 있다.

이 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조형(1606∼1679)을 기리기 위해 그의 6세손인 광주목사(光州牧使) 조운한(趙雲漢)이 세운 것이다. 조형의 자는 군헌(君獻)이고 호는 취병(翠屛)이며, 본관은 풍양(豐壤)이고 승지 희보(希輔)의 아들이다.

1626년(인조 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파방되고, 1630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대교를 거처 사국(史局)으로 옮겼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임금을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 독전어사(督戰御史)가 되고, 이듬해 환도하여 병조좌랑이 되었다.

1651년(효종 2)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와 보덕을 거쳐 승지가 되었다. 1655년 대사간이 되어 일본에 통신사(通信使)로 다녀오고, 1657년 도승지 · 대사간이 되었다.

그 뒤 1659년 동지성균관사로 성균관 좨주 송준길(宋浚吉)과 사학규제(四學規制)를 마련하였으며, 예조참판이 되었다. 이듬해 경기감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형조판서가 되고 1661년(현종 2) 공조판서 · 대사헌 · 예조판서가 되었다.

1663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판윤이 되었다. 이때 동대문 밖 금산(禁山)의 소나무 남벌사건에 관련되어 고신(告身)을 박탈당하였다.

그 뒤 지의금부사 · 우참찬 · 공조판서 · 좌참찬 ·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에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하여 양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 풀려나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현종실록(顯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청선고(淸選考)』
「취병조공강생구지비(翠屛趙公降生舊址碑)」(『광주의 문화유적』, 광주직할시,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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