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비의 높이 274cm. 도선 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 오는 송천사는 폐사되어 유구(遺構:건축의 구조와 양식들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가 거의 없으나 다행히 나한전지라 전해지는 건물지 앞의 개울가에 회은장로비만 홀로 서 있고 맷돌이나 그 밖의 석조물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비신은 세장한 장방형으로 곳곳에 총탄의 흔적과 손상이 있다. 이수는 장방형으로 윗면에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그 아래에 용신의 비늘과 구름무늬가 가득 있고 따로 제액을 마련하지 않았다. 뒷면에는 용의 꼬리부분과 함께 게 · 거북이 · 달팽이 등이 새겨져 있고 그 주위에 구름무늬가 가득하다.
비좌(碑座)는 없었는데 최근에 장방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비문은 조선 후기 시문에 능했던 백곡처능(白谷處能)이 지었고 글씨는 낭성군(朗善君) 이우(李俁)가 썼으며 1677(숙종 3)에 건립되었다. 비신의 윗면에는 “회은장로비명(悔隱長老碑銘)”이란 제명(題名)이 전서(篆書)로 되어 있고 비문은 해서체이다.
비문에는 회은의 출생, 출가 후의 행장과 승장으로서의 활동, 그리고 그의 법손들이 그를 기념하는 비를 세우게 된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음기에는 비 건립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회은(1587∼1672)은 남원 사람으로 자는 응준(應俊), 호는 회은이라 하며 속성은 기씨(奇氏)이다.
15세에 출가하여 옥섬(玉暹)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뒤에 소용 · 호연 · 벽암 등 중장의 제자가 되었다. 1633년에 입암성장(笠岩城將)이 되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의승 벽암을 따라 전공을 세워 다음 해 양호도총섭(兩湖都摠攝)에 임명되었다.
1647년에는 팔방도총섭(八方都摠攝)이 되어 남한산성에 머무르며 많은 공을 세웠다. 1651년에 남옹성(南甕城)을 쌓은 공으로 가의(嘉義)로 승급되었으며 1660년에 자헌(慈憲), 1663년에 정헌(正憲)으로 승진되었고 1672년에 86세로 입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