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중국에 대하여 제후를 자처했으므로 왕실봉작제도도 제후국체제를 모방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의 왕실봉작제는 왕의 적장자를 세자로 책봉하고, 그 이외의 아들들은 적서에 따라 적자는 대군(大君)으로 서자는 군(君)으로 봉작하였다. 제후국을 자처하던 조선은 광무개혁을 통하여 황제체제로 바뀌었는데, 이에 따라 왕실봉작제도 황제체제에 맞도록 변경되었다.
중국의 왕실봉작제는 황제의 적장자를 태자로 책봉하고 그 이외의 아들들은 친왕으로 봉작하였다. 대한제국도 이를 본따서 왕실봉작제를 재정비했는데, 이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친왕부이다. 고종의 아들들을 친왕으로 책봉하고 친왕부를 설치한 것은 1900년(광무 4년) 8월이었다.
당시 이강(李堈)이 의친왕(義親王)으로 책봉되고, 이은(李垠)은 영친왕(英親王)으로 책봉되었으며, 후에 고종의 친형 이희(李熹)는 흥친왕(興親王)으로 책봉되었다. 이들이 친왕으로 책봉되자 당연히 친왕부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친왕부는 황태자비궁(皇太子妃宮)에 소속되었으며 친왕부에 관련된 업무와 회계는 따로 한사람을 선정하여 그에게 위임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친왕부에는 전위(典衛) 2명이 배속되었는데 판임(判任)으로 임명되었다.
친왕부는 대한제국황실이 일제에 의해 이왕가(李王家)로 격하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친왕으로 책봉되었던 흥친왕과 의친왕은 일제에 의해 공(公)의 작위를 받아 이희공(李熹公)과 이강공(李堈公)으로 불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