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는 탕평을 주창하며 관료와 유생들이 당색을 넘어 신민(臣民)으로서 왕조에 충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영조의 탕평책에 대한 비판과 반발도 끊이지 않았다. 그 와중인 1772년(영조 48) 3월에 이조에서 성균관 대사성 후보 3명을 모두 노론 내에 결집한 청명당(淸名黨)이라는 같은 당의 인물로 올린 일이 있었다. 이 일을 빌미로 영조는 더욱 강경하게 신하들이 탕평의 뜻을 따를 것을 요구하였다.
급기야 1772년 7월 23일 관료와 유생들이 당심을 버리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교서를 반포하고, 관료와 유생들에게 당심이 없다는 징표로 명단을 바치게 하였다. 이 명단에 이름을 올린 유생들을 모아 탕평과(蕩平科)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치렀다. 1772년 8월 1일 경희궁 숭정전에서 문과를 치르고, 중일청에서 무과를 치렀다.
시험 당일에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영조는 명단을 바치고도 시험장에 나오지 않은 유생들이 많다는 이유로 유생들을 모두 내보냈다가 무과를 치른 후에 다시 돌아와 문과를 치렀다. 문과에서는 임종주(任宗周) · 남학문(南鶴聞) · 서유방(徐有防) 등을 뽑았고, 무과에서는 조영무(趙永茂) 등을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