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방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병조판서, 경기도관찰사,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원례(元禮)
봉헌(奉軒)
시호
효간(孝簡)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41년(영조 17)
사망 연도
1798년(정조 22)
본관
달성(達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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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병조판서, 경기도관찰사,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원례(元禮), 호는 봉헌(奉軒). 한성부서윤 서종적(徐宗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승지 서명형(徐命珩)이고, 아버지는 수찬 서효수(徐孝修)이다. 어머니는 이언신(李彦臣)의 딸이다. 형이 이조판서 서유린(徐有隣)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68년(영조 44)에 진사가 되어 음보로 교관(敎官)을 지내다가 1772년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 등을 역임하였다. 정조가 즉위하자 우부승지에 임명되었으며, 1778년(정조 2)에 대사간의 자리에 있을 때 『속명의록(續明義錄)』을 언해(諺解)하여 8도에 반포하게 하였다.

그 뒤 이조참의·승지·대사성·대사간·대사헌 등의 요직을 여러 차례 역임했으며, 1782년에는 규장각직제학(奎章閣直提學)에 임명되었다. 1783년에 개성유수로 있을 때, 두문동태학생(杜門洞太學生) 72인 가운데 3인을 개성부 숭절사(崇節祠)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1785년에 이조참판을 거쳐 경기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788년에 한성부판윤, 1792년에 형조판서, 사역원 및 장악원의 제조(提調)를 역임하였다. 1792년에 홍명호(洪明浩)가 금갑도(金甲島)에 유배될 때 함께 고신(告身: 관직 임명 사령장)을 삭탈당했으나 곧 사면을 받아 이조판서·병조판서·공조판서 등을 거쳤다.

1793년 관상감제조(觀象監提調)를 역임할 당시 정조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술수서 제작을 명하였다. 이에 1795년 민종현(閔鍾顯), 심이지(沈頤之) 등과 함께 『협길통의(協吉通義)』를 편찬하였다.

1794년 검교직제학(檢校直提學)으로 있다가 제학(提學) 정민시(鄭民始) 등 10인과 함께 고양(高陽)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다시 부사직(副司直)의 자리에 올랐으며, 1795년에 두 번째로 경기도관찰사로 부임했다가 그 해 진하사(進賀使)의 부사로서 북경을 다녀왔다. 1797년에는 강원도관찰사로서 간성의 인구 동태를 조사하여 『간성유민환접타민이접성책(杆城流民還接他民移接成冊)』을 지어 올렸다.

삼사의 장(長)을 여러 차례 역임했고, 전관(銓官)을 맡아보는 이조와 병조의 판서를 거치면서 정조 때 권력의 중추부에 있었다. 서도에 능했는데, 1785년에 쓴 규장각 상량문 등의 글씨가 있다.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참고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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