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종목은 두 사람이 하는 단식, 2인 1조의 4명이 하는 복식, 남녀 1조의 4명이 하는 혼합복식 등이 있다. 경기는 포인트, 게임, 세트, 매치 4단계로 구성된다. 즉, 4점(포인트)이 되면 1게임을 얻으며, 3:3이면 듀스라 하여 연속적으로 2점을 연속해서 얻어야 이기게 된다.
세트란 어느 한 선수(또는 복식조)가 6게임을 먼저 이겨야 하며, 프로경기나 국제경기에 있어 게임스코어가 5 : 5가 되면 게임 듀스가 되어 두 게임을 먼저 선취하는 선수(또는 복식조)가 그 세트를 가져가게 된다. 게임스코어가 6 : 6이 되면 타이브레이크방식(tie-break system)이 일반적으로 적용되어 보통 7포인트를 선취하면 그 세트를 차지하게 된다. 매치란 승패를 결정짓는 세트 수를 말하며, 5세트매치에서는 3세트를, 그리고 3세트매치에서는 2세트를 먼저 얻으면 승자가 된다.
경기방법은 단식의 경우 토스에 의하여 서브권과 코트사이드를 결정한 뒤 공격자의 서브로 경기를 개시하며, 볼 처리는 일단 지면에 한번 닿은 볼을 쳐 넘기거나, 지면에 닿기 전에 쳐 넘겨도 무방하다. 단, 서브는 반드시 지면에 닿은 뒤 쳐 넘겨야 한다. 서브는 먼저 오른쪽에서 대각선의 상대방 서비스 코트에 넣으며, 득점을 하거나 실점이 되면 왼쪽에서 대각선으로 넣는다.
이와 같이 포인트마다 위치를 바꾸어가며 한 게임이 끝날 때까지 한 사람이 계속하여 서브를 넣는다. 한 번에 2회의 서브권을 가지며, 제1구를 실패하면 제2구를 넣고 두 번 다 실패하면 1점을 잃는다. 그러나 네트에 닿고 서비스 코트에 들어간 서브는 레트(let, 무효)가 되어 다시 서브를 넣는다.
서브권은 한 게임이 끝날 때마다 상대방에게 넘긴다. 코트의 교대는 두 선수가 얻은 게임 수의 합이 홀수일 때에만 코트를 바꾼다(1:0, 2:1, 3:0, 1:4, 0:5 등). 테니스 코트의 길이는 23.77m, 너비는 10.97m의 장방형이며, 네트의 높이는 중앙이 91.4㎝, 양끝이 107㎝이다.
라켓의 길이는 대략 70cm 내외이고 무게와 재질에는 제한이 없다. 테니스 경기는 매너를 매우 중요시하며 백색 유니폼을 착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스코어 방법은 1점을 15(fifteen), 2점을 30(thirty), 3점을 40(forty) 등으로 부르는 것이 특징이다.
테니스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중세 프랑스의 왕실·귀족과 승려들 사이에서 성행하였던 쥬드폼(jeu de paume)이라는 실내게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1874년 영국의 윙필드(Wingfield)가 현재와 유사한 경기로 발전시켰고, 그 뒤 1877년 영국의 존스(jhones)가 윔블던의 크로켓클럽에 소개하여 제1회 테니스대회를 개최한 것이 오늘날 윔블던대회의 시초이다.
이때 코트의 규격, 네트 높이, 공의 크기와 무게 등의 규칙이 결정되었고, 이것을 기초로 개정·증보가 이루어져 현재와 같은 규칙으로 되었다. 세계 각국에서 열리는 테니스대회는 수없이 많지만 가장 전통있고 권위있는 대회로는 전영선수권대회(윔블던), 전미선수권대회(U.S.오픈), 전불선수권대회(프랑스오픈), 전호주선수권대회(호주오픈) 등이다.
이 4개 대회를 세계 4대 토너먼트라 하여 한 선수가 같은 해에 이 4대 대회에서 모두 우승하는 것을 그랜드 슬램(Grand Slam)이라 하여 테니스선수로서 최고의 영예로 인정하고 있다. 특히, 영국의 윔블던코트와 미국의 플러싱 메도우 코트는 모든 테니스선수들이 동경하는 꿈의 코트이다. 개인 선수권대회 이외의 큰 대회로는 1900년부터 시작된 남자국가대항전(4단 1복식의 단체전)인 데이비스컵대회(Davis Cup)와 1963년에 창설된 여자국가대항전인 페드컵대회(Fed Cup)가 있다.
우리 나라에 테니스가 소개되기는 약 80여 년전 미국인 선교사 뱅커와 제중원(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앤더슨에 의해서였으며, 서울 정동의 미국대사관 자리에 코트를 만들어 친 것이 시초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테니스보다 일본인들에 의해 소개된 연식정구가 주로 행해졌으며, 정식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에 의하여 테니스가 시작되기는 1926년 당시 경성제국대학 정구부장이었던 강성태(제2대 대한테니스협회회장)가 연식정구부를 테니스부로 전환시키면서 부터였다.
이후 연희전문학교·경성고등상업학교 등도 테니스를 시작하였고, 1927년 9월에는 일본 대판매일신문 경성지국 주최로 최초의 경식정구선수권대회가 철도코트에서 열렸다. 그 뒤 1930년 9월 세브란스병원의 오한영, 체신국의 강성태 등 10여 명의 발기로 서울경구구락부라는 동호인 단체를 조직, 재경 서양인들과 시합을 하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 경식과 연식정구가 통합된 조선정구협회가 결성되어, 이듬해 7월에 제1회 전국경식정구선수권대회를 개최하였는데, 단식에서는 조두흠, 복식에서는 길인형·김형도 조가 우승하였다. 이 당시의 테니스선수들은 대부분 연식정구에서 테니스로 전환한 사람들이었다.
1948년 국제테니스연맹에 가입하였고, 1955년에는 대한테니스협회와 대한연식정구협회로 분리되었으며, 1960년부터 데이비스컵대회 동부지역 예선에 출전하기 시작하였다. 국산 테니스용품이 개발되고 세계적인 테니스붐이 일기 시작한 1970년대 초부터 우리 나라의 테니스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여 1982년 뉴델리아시아경기대회와 1986년 서울아시아경기대회에서 남녀 모두 금메달을 따는 등 그 기량이 급성장하였다.
1986년 서울아시아경기대회 폐막 후 개최된 데이비스컵대회 동부지역 결승에서 10연패 이후 처음으로 숙적 일본에게 승리를 거두고 1987년 데이비스컵대회 본선에 진출했다. 서울아시아경기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반으로 국내 최초의 본격 프로대회인 KAL컵 코리아오픈테니스선수권대회가 1987년에 창설되었으며, 그 후 각종 프로대회가 국내에서 개최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한편 남자에 비해 활성화가 덜 되었던 우리 나라 여자테니스는 1990년대 중반부터 세계무대의 진출이 본격화되기 시작했으며, 벼룩시장배 및 세아제강컵여자챌린저테니스대회가 잇따라 창설되어 일반인들에게 여자테니스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