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과 연기로 구체적인 적의 상황을 전달하는 봉수(烽燧)는 구름과 안개가 짙게 끼면 잘 전달되지 않는 등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봉수제의 기능을 보완하자는 논의가 거론되다가 1583년(선조 16)부터 급주(急走)인 보발(步撥)을 실시하였다. 1592년에는 이원익(李元翼)의 주장에 따라 경상도에 발마(撥馬)인 기발(騎撥)이 실시되었다.
파발제는 원래 중국의 송나라 때 금나라의 침입에 대비하려고 설치한 군사첩보기관 ‘파발’에서 유래하였다. 전달방법에 따라 보체(步遞)·급각체(急脚遞)·마체(馬遞)로 구분되었다. 보체와 급각체는 사람이 뛰어 전달하는 것이며, 마체는 포졸이 말을 타고 전달하는 것으로 그 뒤 원·명대에 더욱 발달해 우리 나라에 영향을 주었다.
임진왜란 중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군대가 파발제를 이용하자 이의 필요성을 느낀 조정에서는 1597년 5월 집의 한준겸(韓浚謙)의 건의에 따라 명나라의 제도를 본떠 파발을 설치하였다. 인조 때는 서발·북발·남발의 3대로를 근간으로 한 파발제가 완성되었다.
≪만기요람≫에 의하면 파발제 조직은 지역에 따라 직발(直撥)과 간발(間撥)이 있고, 전달수단에 따라 기발과 보발로 나누어져 있었다. 기발은 말을 타고 전송(傳送)하며 25리마다 참(站)을 두었으나 곳에 따라서는 20리 또는 30리인 경우도 있었다.
참에는 발장(撥將) 1인, 색리(色吏) 1인, 파발군(擺撥軍) 5인과 말 5필이 배치되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한편, 보발은 사람이 달려서 전달했는데, 30리마다 참을 두고 이 곳에는 발장 1인, 군정 2인을 배치하였다. 전국의 발참 수는, ≪만기요람≫에는 194곳, ≪대동지지≫에는 213곳으로 기록되어 있어 다소 차이가 있다.
≪대동지지≫에 수록된 파발의 조직망을 보면, 서발은 의주에서 한성까지 1,050리의 직로(直路)에 기발로 41참을 두었고, 그 밖의 간로(間路)에 보발로 45참을 두었다. 북발은 경흥에서 한성까지 2,300리의 직로에 보발로 64참을 설치하고, 간로에 역시 보발로 32참을 두었다. 남발은 동래에서 한성까지 920리의 직로에 보발로 31참을 설치하였다.
파발 운영에서 중요한 것은 발마와 파발군의 확보였다. 발참의 말은 역마·목장마·군마로 보충했지만, 민간에서 차출하는 경우도 많았다. 파발군은 발장(撥長)과 발군(撥軍)으로 구성되었다. 발장은 권설직(權設職)으로서 정6품 이하의 체아록(遞兒祿)을 받고 900일 근무하면 정6품의 사과(司果)에 승진할 수 있었다.
발군은 양인정군(良人正軍)인 기보병(騎步兵)으로 편성되었다. 파발의 주요 임무는 관문서 전달이지만, 그 밖에 외국 사신의 내왕에 따른 편의 제공이나 사문서의 전달도 담당하였다. 전송방법은 기밀문서를 문서봉투에 넣어 실봉하고 관인을 찍은 다음 다시 피각대(皮角帶)에 넣어 체송(遞送)하였다.
일의 완급에 따라 방울〔懸鈴〕을 달았는데, 방울 셋을 달면 3급(急 : 초비상), 둘은 2급, 하나는 1급을 표시하였다. 늦게 전송한 자나 문서를 파손하거나 훔친 자는 법규에 따라 엄벌에 처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문서 전송이 지체되는 경우가 많았다.
발전(撥傳 : 파발로 전하는 것)이 지체된 이유는 발마의 남기(濫騎)와 그로 인한 피폐, 심지어는 사문서의 전달까지도 파발을 이용해, 발군이 고역에 시달리고 급기야 도망치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한편, 국가의 기밀이 엄수되어야 할 공문서를 훔쳐보는 사례가 있어 기밀이 누설되는 폐단도 많았다. 이러한 파발제는 역(驛)과 봉수제와 함께 조선시대 군사 통신체제의 골격을 이뤘다. 그러나 조선 말기의 전화전신 통신체제의 발달로 그 제도적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