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전구서(典廐署)를 계승한 것으로 조선 건국 후에도 그대로 전구서를 설치해서, 영(令, 종5품) 1인, 승(丞, 종5품) 2인, 사리(司吏) 2인을 두었다. 그 뒤 예빈시(禮賓寺)에 합쳐져 분예빈시(分禮賓寺)라 하다가, 1406년(태종 6) 분예빈시와 사련소(司臠所)를 합속, 사축소(司畜所)라 칭하고 별좌(別坐) 3인, 별감(別監) 6인을 두었다. 1466년(세조 12) 분예빈시를 사축서라 개칭하고 사축 1인을 배치함으로써 기본 조직을 갖추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종6품 아문(衙門)으로 정비되어 제조(提調, 종2품) 1인, 사축(司畜, 종6품) 1인, 별제(別提, 종6품) 2인, 서리(書吏) 4인, 차비노(差備奴) 6인, 근수노(根隨奴) 3인을 두었다. 1637년(인조 15) 전생서(典牲署)에 합병되었다가 그 뒤 다시 설치되었다.
1746년(영조 22)에 편찬된 『속대전(續大典)』에 의하면, 기구가 축소되어 제조는 호조판서가 겸임하고, 사축 1인은 감원하였다. 별제(別提, 정6품) 2인은 그대로 두었으나, 서리는 서원(書員)으로 격하되어 2인으로 감원되었다. 1767년(영조 43) 사축서가 유명 무실하다 하여 또다시 혁파하고 호조에 합병해 호조낭청(戶曹郎廳) 1인이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 뒤 구사축서(舊司畜署)로 불리다가, 1865년(고종 2)에 만들어진 『대전회통(大典會通)』에 다시 종6품 아문으로 정비되었으며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이르러 폐지되었다. 위치는 처음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었으나, 뒤에 미동(美洞)으로 옮겼다.
이 관청은 돼지·양·염소·거위·오리 등의 잡축을 사육해 궁중의 가례(嘉禮)·길례(吉禮)·진연(進宴)·진찬(進饌)·선온(宣醞)·사연(賜宴)과 봉조하(奉朝賀)의 월치(月致), 노인(老人)의 세찬(歲饌), 기우제(祈雨祭), 보사제(報謝祭), 선무사(宣武祠)의 절제(節制), 각군문기제(各軍門旗祭) 때와 칙사(勅使)·표해인(漂海人)의 공궤(供饋) 등에 공급하였다.
사축서의 축료 확보를 위한 정책은 국초부터 강구되어 경기도의 여러 읍에서 곡초(穀草)·생초(生草)를 공물(貢物)로 받아 충당하도록 하였다. 1470년(성종 1) 공안(貢案)에 따라 경기도 여러 고을로부터 곡초 2,414동(同), 생초 5,000동을 수납하게 했는데, 수령들이 백성에게 이를 임의로 부과해 폐단을 주는 일이 일어났다.
그 뒤 『경국대전』에서는 경기도 여러 읍의 민전에서 곡초와 생초를 수납하도록 정리되었다. 그러나 축료가 너무 증대해 1509년(중종 4)에 수량을 줄이도록 하였다. 대동법 실시 이후 축료를 호조와 선혜청(宣惠廳)에서 지급했는데, 풀값을 확보하기 위해 여화도(汝火島: 지금의 여의도)에 위전(位田)을 설치, 위전세(位田稅)를 받아 충당하였다. 또 조강(糟糠: 지게미와 쌀겨)은 방민(坊民)에게 돈을 받아 충당하였다. 사축서는 궁중 조달기능은 했으나, 민간 축정(畜政)을 발전시키는 데는 기여한 것이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