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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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에서 어획물의 매매가 이루어지는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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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바다 위에서 어획물의 매매가 이루어지는 시장.
내용

특정 어획물을 어획하는 어장에서 어선과 상선 사이에 어획물의 매매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파시는 실제로는 이보다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어장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 육상 근거지에서 어업자와 어부를 고객으로 한 각종 상행위가 이루어지는 곳도 파시라고 한다.

파시라는 말이 최초로 나타나는 문헌은 ≪세종실록≫이다. 이 책의 전라도 영광군에 관한 기사를 보면, 조기는 동군의 서쪽 파시평(波市坪)에서 산출된다고 하고, 할주(割註)를 달아 설명하기를, 봄과 여름이 교차하는 시기에 여러 곳의 어선이 모두 여기에 모여 그물로 이를 잡는데, 관에서 그 세금을 징수하여 국용(國用)에 쓴다고 하고 있다.

황해도 해주목(海州牧)의 기사에는 조기가 동목의 남쪽 연평평(延平坪)에서 산출된다고 하고, 할주에서 영광군과 똑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영광군 기사에는 파시전(波市田)이라는 것이 보이는데,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군의 북쪽 20리에 있다. 조기를 산출한다. 매년 봄에 경외(京外)의 상선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이를 잡아 판매하는데 왁자지껄하기가 경시(京市)와 같다. 그 어선들은 모두 세금을 문다.”

영광군 앞바다의 칠산탄(七山灘)과 연평도(延坪島) 부근은 조기의 주어장이다. 따라서, 조기 어기가 되면 뒷날 볼 수 있었던 파시가 그곳에서 열렸을 것이다. 파시평이나 파시전은 조기의 어장을 가리킨 것이 아니면 그 어장 인근의 지명을 가리킨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명칭은 파시가 열린 것과 관련성이 있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파시평이나 파시전에서 파시가 열렸기 때문에 파시라는 말이 쓰였을 수도 있다.

위에서 본 파시전에 관한 설명은 당시 파시가 열려 상행위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음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파시의 풍경은 파시풍(波市風)이라고 하는데, 파시풍은 고래로 서해안의 조기 어기에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과거 조기의 최대어장은 전라남도법성포(法聖浦) 앞바다의 칠산탄, 즉 칠산도(七山島) 부근에서 위도(蝟島)에 이르는 수역이었다.

이곳에서 조기가 많이 잡혔기 때문에 조기를 ‘전라도 명태’라고도 하였다. 그 다음의 주어장은 연평도 연해였다. 그러므로 조기파시는 위도와 연평도에서 가장 대규모로 열렸다.

한말 칠산탄의 조기어업의 실태를 전하는 자료에 의하면, 어구는 망선망(網船網)·중선망(中船網)·정선망(碇船網=닻배)·주목망(柱木網)·어전(漁箭) 등이었다.

20세기로 넘어와서는 일본인이 보급시킨 안강망(鮟鱇網)을 많이 사용하였다고 하며, 망어구(網漁具)를 사용하는 어선과, 척수에 있어서 어선을 능가하는 상선(이는 어장에 가서 어선으로부터 직접 조기를 구입하는 상선이었는데, 出買船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이 팔도에서 이곳에 폭주하여 빈 틈이 없을 정도로 바다를 뒤덮었다고 한다.

칠산탄에서의 조기 어기는 이른봄에 시작되어 4월에 끝나는데 이때부터 조기 어군은 북상 회유한다. 그리하여 연평도에서는 조기 어기가 4월에 시작되고 5, 6월경에 끝난다. 이곳에서도 칠산탄 못지않게 조기어업이 성황을 이루었다. 한말에 이미 많은 때에는 수백 척의 어선이 모여들었고, 천리가 넘는 곳으로부터 상선이 몰려오기도 하였다고 한다.

조기 어군이 북상함에 따라 어선과 상선이 북상하고 파시도 북상하였다. 어장에서 가까운 육지는 위도나 연평도와 같은 고도였다. 이 밖에 충청남도의 녹도(鹿島)·개야도(開也島)·죽도(竹島) 등도 파시가 열린 섬이었다.

조기 어기가 되면 이 고도에 각종 상행위를 위한 일시적 취락이 형성된다. 이 취락은 어기의 북상 이동과 때를 같이하여 이동한다. 따라서, 그 취락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일시적 취락의 성격을 지닌다.

이 일시적 취락에서 일시적 상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이 파시이며, 이것이 바로 파시가 일반 시장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그 전형적인 형태가 우리 나라 서해안에서 조기 어기에 발견되는 것이며, 이는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1936년에 조사된 전라남도임자도(荏子島) 서북쪽의 대이도(臺耳島:지금의 섬타리)의 파시를 보면, 그곳에는 바라크로 이루어진 이동취락인 파시가 있었는데, 파시에는 주막·여관(유곽)·요릿집·잡화상·이발관·선구상(船具商)·염상(塩商)·목욕탕 등이 있었고, 이들은 오로지 외지에서 온 어부를 상대로 영업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동할 때는 바라크를 접어서 배에 싣고 다녔다고 한다.

1930년대 중기의 일간지 기사에는 연평도의 파시풍을 현장감 있게 다룬 것들이 보인다. 우리 나라 3대 어장 중의 백미(白眉)로 유명한 연평도 조기어장에는 조기 안강망 어선 약 1,000척과 운반선 및 상선 약 1,000척이 몰려와 장관을 이루었고, 육상에는 성어기(盛漁期)의 어부의 상륙을 노려 급히 문을 연 요리점 30호, 카페 1호, 음식점 53호를 비롯하여 이발관 9호, 목욕탕 3호, 대서소 2호, 여인숙 5호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조기와 함께 연평도의 명물인 낭자군(娘子群)에서는 예기(藝妓) 5명, 작부 95명, 여급 3명, 합계 103명이 활약하고 있었는데, 조기를 쫓는 어부와 어부를 쫓는 낭자군이 뒤범벅이 되어 광복 후에도 조기어업은 주요 어업의 하나로서의 위치를 상실하지 않고 있었고, 파시도 예나 다름없이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조기 자원의 점차 감소에 이은 고갈로 지금은 서해안의 조기어업은 종언을 고하고 말았고, 이에 따라 파시풍도 전설 속의 이야기로만 남게 되었다.

한편, 파시라고 하면 조기파시 이외에 거문도 및 청산도의 고등어파시, 추자도의 멸치파시가 거론되고 있고, 대흑산도에 가면 고래파시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이는 특정 어획물의 거래가 특정 어기에 이동성이 없는 특정 지역에서 성행되어 파시와 같은 광경을 보여주게 되는 데서 생긴 말이며, 이동취락으로서의 본래 의미의 파시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한국수산지(韓國水産誌)』 1(농상공부수산국, 1908)
『한국수산업사』(박구병, 태화출판사, 1966)
『韓國水産業調査報告』(下啓助·山脇宗次, 1905)
『韓國水産開發史』(吉田敬市, 朝水會, 1954)
『朝鮮多島海旅行覺書』(澁澤敬, 日本常民文化硏究所,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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