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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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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고 다니며 사용할 수 없는 큰 것으로, 총포 가운데 일반적으로 구경이 큰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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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들고 다니며 사용할 수 없는 큰 것으로, 총포 가운데 일반적으로 구경이 큰 무기.
내용

발사물도 크고 사정거리도 총보다 멀다. 야포(野砲)라고도 한다. 큰 포는 주로 수레나 바퀴가 달린 동차(動車)에 실어 사용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포를 처음 제조한 시기는 총과 같이 1377년(우왕 3) 이후 화통도감(火筒都監)에서 최무선(崔茂宣)에 의해서이다. 물론, 초기에는 중국의 것을 모방해서 제조되었다.

화통도감에서 제작된 포의 종류는 대장군(大將軍) · 이장군(二將軍) · 삼장군(三將軍) · 육화석포(六花石砲) · 화포(火砲) · 신포(信砲) 등인데, 현존하는 것이나 이에 관련된 기록 등이 없어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이러한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의 포들은 중국의 것을 모방해서 제작한 것들로 성능이 좋지 않아 세종의 명령으로 1447년(세종 29)까지 화기 대개혁을 이룩하였다. 대개혁에 성공한 이후 개혁 전과 후의 성능을 비교한 기록을 보면 포의 사정거리가 전보다 2, 3배 확장되었다.

화기의 대개혁은 포의 내부구조를 격목(激木)을 사용하는 형태로 바꾼 것인데, 이 방법은 우리 고유의 독창적인 것이었다. 격목을 사용함으로써 화약의 폭발력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게 되어 발사물(화살이나 탄환)의 사정거리를 2, 3배 늘릴 수 있었다.

세종 때 개혁된 포의 내부구조는 포의 앞부터 취(취) · 격목통(激木筒) · 약통(藥筒) · 족(足)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취(부이, 주둥이)는 발사물, 즉 나무로 만든 화살[작은 것(중전)의 길이는 79㎝, 큰 것(대전)은 190㎝]을 꽂는 곳이며, 당시의 총과는 달리 한 발씩만 꽂고 사용하였다.

격목통에는 원기둥 모양의 나무(격목)를 철추(鐵鎚:쇠망치)로 박는데, 이유는 약통 속에 넣은 화약의 폭발력을 최대로 강하게 하기 위함이다.

약통은 화약을 넣는 곳인데, 이곳에는 약통 속의 화약에 불을 붙여 주기 위한 점화선을 끼우는 약선혈이 있다. 약통의 뒷부분은 막혀 있으며, 그곳을 족이라고 한다. 화약을 넣을 때 취가 위로 가게 세우면 약통의 아랫부분이 땅에 닿기 때문에 족, 즉 다리라고 한 듯하다.

포의 발사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 포의 속을 청소한다. ② 점화선 끼울 곳을 청소한다. ③ 약통에 점화선[藥線]을 끼운다. ④ 약통에 일정한 양의 화약을 넣는다. ⑤ 철추로 격목을 격목통에 박는다. ⑥ 취에 화살[箭]이나 환(丸)을 끼운다. ⑦ 동차에 놓고 포의 발사각도를 조정한다. ⑧ 약선에 불을 붙인다. ⑨ 약통 속의 화약에 불이 붙은 뒤 화약이 폭발하며 발사물이 목표를 향하여 발사된다.

당시의 포 종류는 장군화통(將軍火筒) · 일총통(一銃筒) · 총통완구(銃筒碗口) · 철신포(鐵信砲) 등이다. 세종의 화기대개혁에 의해 새로이 만들어진 모든 총과 포, 그리고 기타 병기들에 대한 상세한 설계도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그 규모와 구조를 상세히 알 수 있는데, 포의 크기는 다음 〈표〉와 같다.

종류\구분 길이 총구 내경 무게 재질
장군화통 89.5㎝ 10㎝ 140근10냥 청동
일총통 74.7㎝ 6.7㎝ 41근8냥 청동
총통완구 62㎝ 34㎝ 203근 청동
철신포 41㎝ 10㎝ 70근4냥
〈표〉 세종대의 포

세종의 화기 대개혁 때 제작된 포 중에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일총통으로,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1978년 2월 10일 경상남도 통영군 저도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것으로 포 속에서 격목과 화약이 같이 나왔음).

1555년(명종 10)에는 네 가지였던 포의 종류를 천자(天字) · 지자(地字) · 현자(玄字) · 황자(黃字) · 별황자(別黃字) 총통 등과 대 · 중 · 소 · 소소(小小)완구와 철신포, 그리고 불랑기(佛狼機) 1·2·3·4·5호 등 15종류로 늘려서 제작하였다.

1555년의 실록을 보면 당시 왜구들의 침입이 얼마나 심했던지 남대문과 동대문의 종을 녹여 포를 만들었을 정도였다. 이 때의 포들도 세종 말기의 총보다 규모만 클 뿐 내부구조는 마찬가지로 격목을 이용할 수 있는 격목형 포였다. 그러나 이 때의 격목형 포는 격목 대신 흙을 탄환과 함께 다져 넣고 사용하여 때에 따라 격목과 토격을 모두 사용할 수 있었다.

당시의 포 중 불랑기 1∼5호는 유럽에서 배워온 방식으로, 고유한 우리의 포와는 달리 포뒤에서 탄환, 즉 발사물과 화약을 장전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었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각종 포들은 그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여 바다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당시 배에 실린 각종 포들은 일본군의 많은 배를 격침시켰으나 육지싸움에서는 포보다는 총이 더 많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총, 즉 승자총통은 일본군의 조총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육지싸움에서는 불리하였다. 다만,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는 목표물에 도착한 뒤 일정한 시간이 지나서야 폭발하므로 많은 효과를 거두었다.

비격진천뢰는 임진왜란 때 이장손(李長孫)에 의해 발명된 시한폭탄으로, 완구로 발사하였다. 이 폭탄은 작은 나무기둥에 골을 파고 그곳에 점화선을 감아 대나무통에 끼운 시한폭발장치를 화약과 쑥잎, 그리고 삼각형의 쇠파편이 들어 있는 둥근 박 모양의 쇠통에 삽입시킨 뒤 완구로 발사했는데, 비격진천뢰 속에 들어 있는 시한폭발장치 속의 점화선 길이에 따라 빨리 터지기도 하고 늦게 터지기도 하는 것으로, 왜군들이 무척 무서워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주자총통(삼총통) 50개나 사전총통 50개를 수레 위에 장치하여 한 번에 200발 이상의 작은 화살(細箭)이나 100발의 철환(鐵丸)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화차가 행주산성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때 대포는 바다싸움에서 큰 활약을 하였으나, 각종 총은 일본의 조총과 비교가 안 되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우리의 고유한 포는 임진왜란 이후에도 계속 발전되었으나, 총은 조총, 즉 화승총으로 바뀌어 개량되고 나머지 다른 총들은 대부분 없어지고 말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68년(현종 9)과 1669년경에 각종 포는 다시 개량되는데, 포의 종류는 크게 변하지 않았으나 1555년에 만들어졌던 각종 포보다 포신에 있는 마디가 좀더 뚜렷해지고 내부도 더 정밀하게 제조되었다. 내부구조는 1555년의 각종 포와 같은 격목형구조의 포들이었다.

1668년과 1669년에 제조된 각종 포들은 현재 몇 종류가 박물관 등에 남아 있다. 그 중 최대의 것은 천자총통으로, 길이 136㎝, 입지름 118㎜, 무게 700근이다. 무게 50근짜리 대장군전을 발사하면 1,200보를 날아가고, 포탄을 쏘면 약 4㎞를 날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천자총통은 현재 충청남도 아산 현충사에 전시되고 있다.

1874년(고종 11)에는 대포 · 중포 · 소포를 운현궁 별관에서 제작하여 같은 해 3월에 완성한 뒤 강화도의 해안포대에 배치하였다.

이 때 만든 포들은 외국의 포를 모방한 새로운 것으로, 큰 바퀴의 포대에 설치하여 이동하면서 사용하거나 해안의 고정포가(固定砲架)에 설치하여 사용하였다. 광복 이후 미국의 도움으로 현대적인 무기체제를 유지하게 되었다.

야포는 화기 및 수송수단에 따라 구분한다. 화기에 의한 분류는 대포와 미사일로 구분하며, 대포는 다시 포열과 사각에 의하여 형사포와 곡사포로 구분된다. 또 수송수단에 따라 견인포와 자주포로 구분되기도 한다.

포를 보유해오다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자주국방정책에 힘입어 1980년경에는 국산 105㎜ 곡사포와 155㎜ 곡사포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105㎜ 곡사포의 경우 그 사정거리는 18㎞이고, 155㎜는 약 30㎞이다. 그리고 1995년 3월과 1997년 10월에는 국산미사일 ‘천마(天馬)’의 시험 발사가 성공적으로 실시되었다.

참고문헌

『신기비결(神器秘訣)』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
『융원필비(戎垣必備)』
『건군50년사』(국방군사연구소, 1998)
『무기체계』(이흥주, 김철환 공저, 청문각, 1990)
『한국초기화기연구』(채련석, 일지사, 1981)
『지상무기』(국방과학연구소,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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