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미상의 필사본으로 필사시기는 17세기말로 추정된다. 불분권 1책 50장. 오사란(烏絲欄), 행자수부정(行字數不定), 가철(假綴), 가로 26.3×세로 43.5㎝, 저지(楮紙)이다.
서·발문 없이 권수(卷首)에는 풍산유씨 선대의 내외세계와 고려말호적초출(高麗末戶籍抄出), 족보범례를 기재한 다음, 보도를 사주단변(四周單邊)으로 8간의 횡선을 치고 제1세 시조에서 8세까지, 다시 줄을 바꾸어 9세에서 16세까지 설정해 놓고 맨 앞에는 풍산유씨족보 세계도와 내외자손을 기재하였는데, 제4대조부터는 명휘(名諱)·관직·처계·묘소를 기재하였으나 생몰년월일을 적지 않았다. 이 초보의 내용과 특징은 범례에 기술되어 있다.
풍산유씨족보의 편간경위를 살펴보면 당초 유운룡(柳雲龍)·성룡(成龍)형제가 16세기말 문호를 크게 일으키자 선대조상의 세계와 사적을 정리하였다.
유성룡은 선조가 남긴 호구단자와 교지 및 안동부아에 유전되고 있던 고려말 호적 등을 참고하여 종친영모록(宗親永慕錄)을 편찬함으로써 풍산유씨 하회파의 상계유래와 조상유래가 정리되었다.
그 아들 유진(柳袗)이 유지를 받들어 가보를 초안했던 것이며, 그 손자 유원지(柳元之, 1598∼1674) 등에 의하여 본보가 초안된 것 같다. 초안시기를 자료의 결여로 정확한 연대는 밝혀져 있지 않았나 최종 등재자를 추적해 볼 때 17세기 후반 유원지·유천지(柳阡之)에 의해 초안되었고, 그 손자 내지 증손대는 그 자손들에 의해 추기된 것 같다.
등재 내용 가운데 고려말 조선초 안동부호적에서 초록(抄錄)한 내용은 고려말 조선초 풍산현의 토성들의 내부구조와 그 혼인관계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풍산현의 토성들과 같이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각읍성씨들은 읍사(邑司)을 장악한 향리층으로서 상경종사하기 전에는 철저한 지역내혼·계급내혼제를 지키고 있었다.
이 초보는 전기 족보와 후기 족보의 중간에 개재한 것으로 전자의 것과 후자의 것이 혼재한다. 하회마을 풍산유씨의 중흥조인 유운룡(목사)·성룡(영의정)형제대에 이르러 선대의 세계가 정리된 영모록과 가보가 편찬되었고 그 아들대를 거쳐 다시 보완, 첨가되었다가 그 손자대인 17세기 말에 이르러 정식 초안되었는데, 뒷날 간본의 모체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