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규복 ()

법제·행정
인물
일제강점기 경상북도참여관, 충청북도지사,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관료. 서예가 ·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덕중(德仲), 온재(溫齋), 아가키 게이후쿠[垣圭復]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1년(고종 18)
사망 연도
1967년 9월 13일
본관
청주(淸州)
출생지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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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참여관, 충청북도지사,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관료. 서예가 ·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본관은 청주(淸州). 자(字)는 덕중(德仲)이고, 호는 온재(溫齋)이다. 창씨명은 아가키 게이후쿠(井垣圭復)이다. 주사 한만홍의 아들로 형 한규호는 구한말 군인으로 기호흥학회와 기업인으로 활동하였다. 한말 관비유학생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도지사를 지낸 ‘신념형 친일파’의 한 사람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81년 한성부 평동(平洞)에서 출생하였다. 출신배경은 부친이 하급 관료에 재직하는 등 중인계층에 속하였다. 일찍부터 근대 교육을 받고 시류에 적극 대응해 갔다. 1893년 3월 12세때 현채(玄采)가 설립한 사립 을미의숙(乙未義塾, 이후 수하동공립보통학교로 변경)에 입학하여 일본어 수업을 받았다. 1897년 3월에는 관립(官立) 영어학교로 진학하여 2년간 수학하였고, 이 기간에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도 참여하였다.

영어학교를 졸업한 후 1899년 4월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東京]로 유학을 떠났다. 도쿄 보통강습소(普通講習所)에서 기초교육을 받고 같은 해 9월 간다(神田)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1년간 수학하고 중등 과정을 마쳤다. 1900년 9월 와세다(早稻田)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하여 수학 중 1903년 7월 정부의 명령으로 귀국하여 대한제국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1904년 참모부(參謀部) 번역관보(飜譯官補)로 임명되었고 1905년 군부(軍部) 번역관으로 승진하였다. 1906년에는 탁지부(度支部) 번역관으로 옮겼다. 1908년에 탁지부 서기관을 겸직하였고 1909년 7월 임시토지조사국 서기관으로 임명되었다. 일제의 강제 병합조약 체결로 국권이 넘어간 뒤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 감사관(監査官)에 임명되었다. 1912년 8월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3년 1월 경상남도 진주군수로 임명되었고, 1918년에 동래군수로 자리를 옮겼다. 1921년 충청남도 참여관(參與官)으로 승진하였고 1924년 경상북도 참여관으로 옮겼다. 1926년 충청북도 지사로 승진하여 근무하다가 1929년 황해도로 전근, 1934년 퇴직하였다. 일제시기 조선인 도지사 42명 가운데 엘리트 출신 7∼8명 중 한명이었다.

일제 고위관료를 역임하며 식민통치에 협력한 공로로 1921년 훈6등, 1925년 훈5등, 1926년 훈4등, 1929년 훈3등 서보장을 차례로 받았으며, 1929년 11월 귀족의 예우에 준하는 종4위를 거쳐 1933년 4월 정4위에 올랐다. 서예에 능해 1926년부터 1930년까지 선전(鮮展)에서 4회나 수상하였다.

퇴직 후 여러 단체의 중요 직책을 맡으며 일제 식민정책과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였다. 1933년 6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약 12년 2개월 동안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칙임관 대우)로 있으면서 전쟁 위문행사와 국방헌금 모집을 위한 시국강연회에 참여하였다.

1936년 11월에는 ‘조선인 징병제 요망운동’ 발기인 및 상임준비위원을 담당하였다. 1938년 2월 ‘조선인 지원병제도 제정 축하회’ 부회장, 1939년 2월 ‘경성부 육군병지원자후원회’ 이사, 1943년 8월 ‘징병령 실시 감사헌금운동’ 발기인으로 활동하였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내선융화를 주창하는 친일단체 동민회의 이사와 부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41년 민간 전쟁협력 단체인 흥아보국단과 임전대책협의회에서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1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임전보국단의 이사장과 부단장으로 활동하면서 「매일신보」에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전쟁협력을 선동하는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였다.

1938년 일제가 전쟁 동원체제 구축을 위해 설치한 ‘시국대책조사회’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39년 4월부터 1944년까지 전쟁협력 외곽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에는 주식회사 한국곡자의 대표이사로 재직하였고, 1949년 반민특위에 자수하였다가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이후 기업 활동과 언론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하였다.

참고문헌

『일성록(日省錄)』
『조선총독부관보(朝鮮總督府官報)』
『매일신보(每日申報)』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8(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일제하 조선인 관료 연구』(박은경, 학민사, 1999)
『일제침략과 친일파』(임종국, 청사, 1982)
『대한제국관원이력서』(국사편찬위원회, 1972)
「제1공화국의 일제 친일세력 충원」(오성진, 『친일파』 Ⅲ, 학민사, 1993)
「일제하의 한국인 관리들」(이기동, 『신동아』, 1985.2)
집필자
이병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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