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일어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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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
1891년(고종 28) 서울에 설립되었던 관립 일어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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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91년(고종 28) 서울에 설립되었던 관립 일어학교.
내용

설립 목적은 일본어를 가르치고 역관(譯官)을 양성하는 데 두었으나, 일제의 침략정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설립 당시인 6월에는 서울의 주자동에 위치하였으며 뒤에 교동의 운현궁 맞은편으로 이전하였다.

그 뒤 1895년 5월 「외국어학교관제」가 공포됨에 따라, 다른 외국어학교와 같은 학제에 의하여 운영되었다. 「외국어학교관제」에는 지방에 분교를 설치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그에 따라 1895년 6월에 인천 일어학교와 1907년 3월에 평양 일어학교를 설립하였다.

한국인 교사는 한성일어학교에 현헌(玄櫶)·최재익(崔在益)·박영무(朴永武)·유제달(柳濟達) 등이, 인천 일어학교에 이근호(李根浩)·최정하(崔鼎夏)·서병협(徐丙協) 등이, 평양일어학교에 조낙홍(趙樂鴻)·나영곤(羅榮坤) 등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다른 외국어학교의 분교는 설립되지 않았다.

1900년 6월에는 「외국어학교규칙」이 공포되어 교과목은 일어 외에 일어로 일반 학문도 가르치며, 한문으로 독서·작문·한국사 및 지리도 가르치도록 하였다. 또한 종래의 입학 연령 16세 이상 25세 이하를 15세 이상 20세까지로 바꾸었다. 이들 일어학교는 수업연한 3년에 3학기제로 편성하였으며, 교수 8명과 서기 1명으로 규정했다.

1906년에는 한성일어학교에 야간부를 설치하였으며, 「외국어학교령」에 따라 1907년에 한성외국어학교로 통합되었다. 1906년 이들 일어학교의 재학생 수는 88명이었으며, 1908년부터는 1년제 속성과가 설치되었다. 1910년까지 한성 일어학교는 본과 190명, 속성과 71명의 총 261명, 인천 일어학교는 63명, 평양 일어학교는 25명을 배출하였다.

다른 외국어학교보다 많은 졸업생을 배출한 것은 을사조약의 체결로 일본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화된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 뒤 통합된 한성외국어학교는 1911년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한국개화교육연구』(손인수, 일지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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