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수 ()

법제·행정
인물
일제강점기 중추원찬의, 중추원고문, 이왕직장관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경문(景文)
영애(頴愛)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2년(철종 13) 1월 19일
사망 연도
1933년 10월 7일
본관
청주(淸州)
출생지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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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중추원찬의, 중추원고문, 이왕직장관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경문(景文), 호는 영애(頴愛)이다. 1862년 1월 19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88년 8월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9월 승정원의 가주서가 되었다. 1889년 권지승문원 부정자, 1893년 검열, 1894년 6월부터 동부승지·예조참의·우부승지·우승지를 역임하였다. 1895년 4월 한성재판소 판사가 되었고, 6월 법률 기초위원, 10월 학부 학무국장이 되어 10월 14일 한성사범학교 교장을 겸임하였다. 1896년 7월 학부 참서관으로서 외국어학교 교장을 겸임하였다. 1898년 6월 주차(駐箚) 영국·독일·이탈리아 공사관의 2등 참서관으로 임명되었고, 1899년 5월 외부 참서관이 되었다. 1900년 5월 창원 감리 겸 부윤이 되어 1903년 5월까지 감리직을 수행하였다. 1903년 5월 중추원 의관이 되었고, 1905년 11월 무안 감리에 임명되었다.

1906년 1월 보빙대사 이재완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다녀오고 2월 일본 정부로부터 훈3등 욱일장을 받았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의정부 외사국장이 되었다. 같은 해 9월 내부 지방관 전고위원, 11월 의정부 참찬, 12월 형법 교정관이 되었다. 1907년 4월 『증보문헌비고』 감인위원장·문관전고 위원장, 6월 내각 서기관장·내각 부동산법 조사위원·각부 관제 조사위원장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 ‘일본 황태자 도한 봉영위원’이 되어 일본 정부로부터 훈2등 서보장을 받았고, 1909년 9월 일본 황태자 도한기념장을 받았다.

1908년 9월 대만과 조선의 식민화를 보조하고 촉진하기 위해 일본에서 발족된 단체인 동양협회의 회원으로 가입하고 찬성금 50원을 기부하였다. 같은 해 10월 문관 고등전형 위원장이 되었다. 1909년 11월 ‘이등박문추도회’ 설행 위원장 및 위원(독제문 담임)을 맡았고, 1910년 6월 전 통감 소네의 문병을 위해 일본에 다녀왔다.

일제 강점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한일합병에 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10년 10월 7일 발표된 남작 작위 수여 대상자에 포함되었다. 같은 해 10월부터 11월까지 일본의 ‘천장절’에 즈음하여 조선귀족관광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911년 1월 13일 일본 정부로부터 2만 5천원의 은사공채를 받고, 1911년 4월 24일 조선귀족회의 결성에 참여하고 간사로 선정되었다. 1912년 8월 1일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고 12월 종5위에 서위되었다.

1910년 10월부터 1912년 8월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와 1912년 8월부터 1919년 10월 20일까지 중추원 고문을 역임하였다. 중추원 고문으로 재직 중 조선총독부가 조선인을 동화시켜 일본제국의 ‘신민’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추진하였던 ‘반도사 편찬사업’의 심사위원을 맡았다.

1915년 11월 다이쇼[大正]대례기념식에 참석하여 다이쇼대례기념장을 받았고, 돌아와서 11월 25일자 『매일신보』를 통해 일본 천황을 찬양하고 한일합병의 당위성을 설파하였다. 같은 해 열린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의 경성협찬회 유공회원으로 100원을 출연하였다. 1917년 10월 3일 조선불교옹호회 제1회 역원회에 참석하고 부회주로 선정되었고, 1925년 5월 재단법인 조선불교단의 부단장 및 이사가 되었다. 이들 단체는 조선 불교에 대한 일제의 영향력 확대와 조선인에 대한 사상 통제를 통한 ‘내선융화’ 보조를 목적으로 하였다.

1919년 10월 20일 이왕직 찬시에 임명되었고, 11월 이왕직 장시사장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 26일 ‘고 이등박문공 10년제’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제단에 참배하였다. 1921년 6월 11일 조선산림회 창립총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10월 『매일신보』 5,000호 발행을 기념하는 축사를 통해 『매일신보』가 문화정치 선전과 일선융화에 앞장섰다고 평가하였다.

1926년 순종황제 사후 ‘고 대훈위 이왕 장의위원’을 맡았고, 1927년 4월 7일부터 1932년까지 이왕직 장관을 지냈다. 1928년 11월 쇼와 천황 대례기념식에 참석하고 쇼와대례기념장을 받았으며, 이어 돌아온 직후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지면을 통해 “나는 지존을 지척에서 모시어 그 장엄 고아한 성전을 배관할 때에는 요순시대를 다시 만난 것 같은 감격에 겨워 눈물에 목이 메었습니다.”라는 소감을 피력하였다. 1929년 9월 조선 귀족들의 파산 구제를 목적으로 한 사단법인 창복회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13년 7월 21일 정5위, 1918년 10월 10일 종4위, 1924년 2월 20일 정4위, 1932년 7월 종3위까지 차례로 승서되었다. 1922년 9월 28일 욱일중광장, 1923년 8월 27일 훈1등 서보장, 1931년 8월 13일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1932년 7월 이왕직 장관직에서 퇴직하면서 일본 궁내성 궁중고문관에 임명되었다. 1933년 10월 7일 사망하였다. 그의 작위는 1933년 12월 1일 아들 한상기가 세습하였다.

참고문헌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 Ⅳ(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8)
집필자
최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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