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단주(湍州). 본래 단주의 이(吏)로서 과거에 급제하여 상주사록(尙州司錄)에 보임되었다가, 1111년(예종 6) 우보궐(右補闕)에 올라 시정의 득실을 논하였다.
1113년에는 비서소감(秘書少監)을 거쳐 1121년에는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올랐는데, 이때 최홍사(崔弘嗣)가 사사로이 군사를 동원하여 개국사(開國寺) 대장당(大藏堂)을 창건하려 하므로 이를 탄핵하다가 서경부유수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대방공 왕보(帶方公 王俌)의 사건에 연루되어 사촌형 한안인(韓安仁)이 죽임을 당하자 한충도 외지에 유배되었다.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실패한 후 1127년(인종 5)에 예부시랑을 거쳐 서경유수가 되니 백성들이 듣고 모두 기뻐하였다고 한다.
국자좨주 한림시독학사(國子祭酒翰林侍讀學士)를 거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역임하고 이듬해에 별세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학문에 돈독하여 이르는 곳마다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