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얼 출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맹위를 떨쳤다. 1594년에는 겸사복(兼司僕)으로서 적군이 퇴각한 충청도에 의병들이 갖추어놓았던 군기들을 수습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명나라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 의하여 속오법(束伍法)이 시행되면서 속오군을 창설하였는데, 이에 응모하여 선봉장이 되어 이시발(李時發) 휘하에서 호서지방의 속오군을 훈련시켰다.
이때에 충청도 홍산의 서얼출신으로 무량사(無量寺)에 거처하던 이몽학(李夢鶴)과 결탁하여 난을 도모하였는데, 마침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홍주로 가면서 이몽학에게 먼저 거병하면 뒤에 합세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몽학은 무량사 승려들과 더불어 난을 주도하여 홍산·임천·청양·정산 등 6개의 고을을 점령하고, 그가 있는 홍주로 갔다. 이때 홍주목사가 민병을 수습하고, 남포현감·수사(水使) 등이 수영병(水營兵)을 이끌고 홍주에 들어가자 이몽학은 홍주를 공략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기미를 알아챈 그는 면천으로 도망하였으나 면천군수 이원(李援)에게 잡혀 이몽학과 함께 참수형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