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는 차를 마시는 풍습이 매우 성행하였는데, 특히 왕족·귀족 사이에서 더욱 성행하였다. 또한, 사원에서는 불전에 차를 달여 공양하는 일을 매우 중하게 여겼다.
『고려사』에 의하면, 왕이 행차를 할 때에는 진다(進茶)의 예를 존중하여, 1159년(의종 13) 3월 왕이 현화사(玄化寺)에 행차하였을 때에는 동서양원의 승려가 각기 다정(茶亭)을 배설하여 진다례를 행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러한 풍습이 있었으므로 왕이 행차할 때 도중에서 차를 달여 대접하기 위하여 행로다담이 필요하였다.
『고려사』 여복조(輿服條)에 의하면, 의종에게 상정한 법가위장(法駕衛仗) 중에 행로다담에 군사 4인을 둔다는 내용과 상원일(上元日)과 연등일에 봉은사(奉恩寺) 진전에 친행할 때와 중추 팔관회에 공출어(公出御)할 때에는 위장에 행로다담을 각각 둔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 행로다담의 용구 일습은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문헌인 『임원십육지』「섬용지(贍用志)」에 수록되어 있는 제로(提爐)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제로는 높이 1.8척, 너비 1∼1.2척이고, 내부는 3층으로 되어 있어 제일 아래층에 화로가 설치되어 있고, 중간층에 물을 끓이는 주전자가 설치되어 있다.
또 『삼국유사』충담사조에는 경덕왕이 귀정문(歸正門) 누상에서 충담(忠談)을 만났을 때 앵통(櫻筒 : 앵두나무로 만든 통)에 다구(茶具)가 있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앵통도 행로다담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